우리는 죄악을 처음 저지르려 할 때 그것을 경고하여 바로잡기는 쉽다. 죄악은 터져 나오는 물줄기 같아서 우리는 죄악에 물들기 전에 그것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나오미 (룻기1:4)의 경우는 얼마나 쓸쓸하고 비통한 것인가! 아들을 잃고 남편을 잃은 두 가지 일이 한순간에 온전히 그녀에게 닥쳤으니 어떻게 그녀가 위로 받으랴 (아사야 47:9). 이렇게 좌정하고 있는 자에게 위로를 보낼 수 있는 분은 주 하나님 뿐이다.
만일 하나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 속에서 자기의 죄와 임무를 깨닫지 못하였다면 다른 고통이 오게 된다. 한 집안에 <죽음이 닥쳤을 때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므로 그것을 바로 잡도록 하여야 한다.
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게 하고는 우리의 죄가 생각나게> 하신다 (열왕기상 17:18). 하나님께서 가시덤불로 우리의 길을 방해하시는 것은, 우리를 그의 나라로 똑바로 돌아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이나 그 밖의 어떤 일로 인하여 우리들의 친척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함께 있는 동안 우리가 그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우리의 의무를 다 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그들이나 우리 스스로의 양심이 증언해 준다면,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이별의 고통을 덜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그들과 함께 있을 동안 우리는 그들에게 성실히 대함으로써 헤어지더라도 친척들에 대한 우리의 과실로 인해서 가슴 아프게 후회하지 않아야 된다.
친구들이 헤어질 때에 서로<기도>해 주면서 헤어진다는 것은 퍽 아름다운 일이다. 인자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자는 자기자신의 고통보다 남이 당하는 슬픔이나 자기로 인해서 남이 당하는 고통을 매우 가슴 아프게 여긴다.
우리는 때때로 작은 일들의 도움으로 중요한 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도 함을 알자.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정당하고 정직해야 할 뿐 아니라, 정중하고 명예로와야 하며, 남에게 들킬 것을 꺼려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솔직히 정직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정책이 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그들의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신앙을 기꺼이 버리며 도저히 신앙에 붙어 있을 수 없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지만 <성결>한 생활을 하려 하지 않는다. <믿음>은 이 세상의 욕심과 함께 할 수 없음으로 주 하나님을 따르려는 자는 세상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가 바라는 모든 선을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신 <주님>께 구해야 마땅한 법이다.
<말씀과 기도>로 봉사하는 사역자들은 남에게 권면을 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 이듯이 또한 이러한 인간관계에 몰입하는 자들을 위해서 행복을 기도해 주기에도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지도자>는 그 시대에 쓸모있고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한다.
참된 참회에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있기를 바라서 요행(우상)으로 섬기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보좌를 우리의 마음속에다 제공해 준 그런 모든 것들의 전적인 무익함을 철저히 회개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탐닉(耽溺-INDULGENCE)하고 있는 감각적 쾌락이 우리의 만족이 될 수 없음과 우리가 탐닉(耽溺)하고있는 이 세상의 부귀도 우리의 기업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밖에서는행복하거나평안을찾을수없다는사실을깨달아야한다.
캐나다동부 토론토에 위치한 아름답고도 큰 공원 산책로를 수시로 거닐면서 수시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4계절 어떤 때라도 여러 마리의 암 수컷 짝을 이룬 청설모 검정 다람쥐들이 자유를 만끽하며 공원은 물론 뒷마당 잔디와 담벼락을 달리고 나무를 오르내리는 모습은 한편의 그림이라고 표현 할수도 있다.
겨울에는 새하얗게 마당과 공원을 덮은 눈 위에서도 청설모 다람쥐들이 그렇게 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애완견을 데리고 공원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조깅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시상이 저절로 떠오르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글을 쓰고, 글들을 출판하고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글을 쓸 수 있는 글 소재는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다운타운에 간혹 갈때면 아름다운 공원에 간혹 몇 사람은 대낮부터 술, 약물에 취했는지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경우도 간혹 보게 된다. 일어나 일을 하고 창의적인 인생을 가꾸어야 할텐데 인사불성이 된 사람도 있음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정신차리고 일어나야 하겠는데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겠는데 그렇지가 못한 경우도 있다.
현대인들 중에는 몸으로는 일어났으나 마음으로는 낙심 절망하여 인사불성이 되어 탄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없지 않다.
몸은 일어났으나 마음은 쓰러져 있다는 말이다. 늘 도망가는 심정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도망간다는 것은 쫓긴다는 말이요 쫓긴다는 것은 용기를 잃은 상태를 말한다.
도망간다는 것은 이웃과 멀어진 상태로써 마음에 큰 상처가 난 상태이다.
사타나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멀어지게 한다는 뜻이다. 인생들을 이웃들과 점점 멀어지도록 꾀이는 마음상태이다.
사타나는 파괴자라는 뜻이다. 육신의 이웃을 떠난 자가 있는가 하면, 마음으로 삶의 근원을 떠나는 경우가 있다. 현실이 무서워 도피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도 인류가 처한 냉혹한 현실을 도피하거나 현실에 동화되므로 바른길을 떠나는 인생이 많다. 그런데 역사를 이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한 것보다 정도의 도전을 감행했다.
홍해를 건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아이성을 재도전하여 무너뜨렸고 가나안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입성한 사람들과 같이 말이다.
절망의 굴, 암흑의 굴, 단절의 굴, 의심의 굴, 악의 굴 속에서 정신을 잃고, 혼미하여 미래의 비젼을 송두리채 상실한 가운데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안타까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