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소망] 논리 아닌 불변의 진리로

● 교회소식 2014. 2. 17. 16:2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다양한 정보들과 함께 모든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사라지는 것이 있다.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논리가 맞다고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특히 신에 대한 논리는 새로운 해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만 알고 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주기적으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거짓 논리들이 대부분 이라는 것이다.
진리 하나에 수많은 논리들이 있고 정통 논리가 아니면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게 된다. 자신에게 이해가 된다는 논리를 진리로 받아들이면 단 한가지로 존재하는 진리는 각 사람들의 논리에 의해 왜곡되어지는 것이다.
진보의 논리와 보수의 논리가 다르다. 외경을 사용하는 천주교의 논리와 정경만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논리가 다르다. 세례를 주장하는 교단과 침례를 주장하는 교단 사이에도 조금은 다른 논리가 존재한다.
 
논리가 다르다는 것은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달라지게 만든다.
우유가 사람에게 좋다고 평생 마셔왔는데 이제는 우유가 사람에게 가장 해로운 음식 중에 하나 라고 한다. 이런 주장들에도 분명히 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마셔야 하는가? 아니면 마시지 말아야 하는가? 이것은 내가 선택해야 하는 실질적 행동을 요구한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발전없는 목회나 성공하지 못하는 인생이 아니다. 잘못된 논리로 하나님의 모습을 잘못 그리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성경의 새로운 해석과 논리들이 사람들의 알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고 다양한 이해에 쉽게 접근한다. 
주위의 그리스도인들도 가끔 어떤 분의 성경 해석이 남다르다고 칭찬을 한다. 그리고 목사인 나에게도 접해 볼 것을 권한다. 

침례교회라는 단어는 미주 지역 원어민들과는 달리 한인들 사이에서는 조금은 익숙하지 못하다. 특히 이단들이 침례교 이름을 많이 사용하면서부터 침례교회는 이단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침례교회 목회를 하면서 가끔 겪는 일이다.
다른 복음주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침례교 역시 수많은 피흘린 자취를 남기며 복음의 순수 진리를 지켜왔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단 영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너무 많은 논리 속에 다양한 결론들이 신앙을 위협하는 시대에 3가지 진리를 교회 2014년 표어로 삼았다.

『하나님 만이 창조주시다. 예수님 만이 구세주시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심판자 앞에 선다.』

나와 상관없을 인기있는, 그리고 오감을 자극하는 잘못된 종말론에 휩싸여 따라 다니며 두려워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주실 개인의 종말을 아름답게 준비하도록 돕는 목회를 하고싶다.

< 임함남 목사 - 토론토 베다니침례교회 담임목사 >


연합선교 시너지효과… “함께 나눠요”

● 교회소식 2014. 2. 17. 16:2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선교회 영역도 ‘세계화’
사역경험과 정보 등 공유

연합 선교의 새 지평을 여는 한편 참가교회와 단체·영역도 전세계로 넓혀나가며 확고한 선교연합단체로 자리잡고 있는 ‘중미 선교회’(회장 임수택 갈릴리장로교회 담임목사, 부회장 송창규 등대교회 담임목사·박우석 니카라과 선교사, 사무총장 박수배 전도사)가 올해 예정된 여름 단기선교를 앞두고 ‘제3차 연합 단기선교 세미나’를 오는 2월23일 주일 오후 6시30분 성산장로교회(담임 유윤호 목사: 1300 Caledonia Rd.)에서 개최한다.
 
중미 선교회는 지난 10년 동안 15회의 단기선교를 통해 중미 오지에 복음을 전하고 수백명의 현지 목회자 세미나와 교회 개척으로 복음전파의 시너지 효과와 선교의 열매를 거두면서 선교참가 교회와 지역도 캐나다에 그치지 않고 중동의 터키(박상윤 선교사), 남미 콜롬비아(이상천 한인연합장로교회), LA(권병록 LA평화장로교회) 등지로 크게 확장됐다. 지난 해의 경우 12개 교회가 연합, 72명이 니카라과 선교에 동참해 사역한 바 있다.
선교회는 그동안 축적한 중미선교의 경험을 바탕으로 관심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노하우를 전하기 위해 토론토지역 세미나를 마련한다면서 많이 참석해 풍성하고 유익한 정보와 뜨거운 선교열정을 나누기를 권했다. 참가대상은 단기선교를 계획하고 있는 교회 목회자와 선교부, 올해 단기선교에 참여하고 싶은 성도들, 중미 단기선교 자료를 필요로 하는 이 등이며 참가비와 교재비 등은 없다.
 
이번 3차 세미나는 지난해 선교 동영상 상영과 간증을 시작으로 송창규 부회장이 ‘단기선교 및 연합선교’라는 강의를 하는 것을 비롯, ‘노방전도 및 전도집회’(고승록 참좋은 복된교회 담임목사), ‘어린이 사역- VBS’(서영희 등대교회 전도사), ‘목회자 세미나’(임수택 회장), ‘단기선교 훈련’(문은성 소래교회 담임목사), ‘단기선교 비자와 재정관리’(이영진 갈릴리교회 장로) 등과 중미선교회가 주관할 ‘2014 연합단기선교 개요’ 를 박수배 사무총장이 설명할 예정이다. 간단한 다과와 함께 단기선교강좌(1강~7강) CD도 무료 제공한다.
선교회 임수택 회장은 “연합 단기선교는 개교회의 재정적 부담이 줄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며 은사와 사역의 다양성 및 전문성이 확보되고 강력한 선교사역은 물론 교육선교의 지평을 여는 등 전략선교의 장점이 있다”고 강조, 금년에도 많은 동참을 기대했다.

< 문의: 647-824-8870, 416-471-0099, andy6774@gmail.com >


[한마당] 우리 내면의 식민사관

● 칼럼 2014. 2. 17. 16:1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960~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학자의 한 분은 이기백(1924~2004) 선생이다. 그의 <국사신론>(1961)은 낡은 역사서술에 싫증난 우리의 시야를 활짝 틔워준 참신하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저서의 서론 부분은 ‘식민주의적 한국사관 비판’이란 제목의 독립된 논문으로 그의 사론집 <민족과 역사>(1971)에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에서 짐작되듯 그의 역사연구는 지난날의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를 털어내고 주체적인 민족사학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40여년 만에 <민족과 역사>를 새로 들춰보면서 그의 역사관이 나 자신의 사유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물론 식민주의 사관의 극복을 위해 노력한 사학자는 그 혼자만이 아니다. 해방 후 국사학 제1세대라고 하는 천관우·김철준·이우성을 비롯하여 더 선배인 홍이섭, 후배인 김용섭·강만길 등 많은 학자들이, 전공 분야가 다르고 방법론에 차이가 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민족사학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수십년 연구에 매진했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이 그토록 넘어서고자 애썼던 식민주의 사관의 실체에 관하여 오늘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돌아보자.
 
일제 관변학자들의 한국사 연구는 이미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학 전공자들에게는 상식에 불과한 이 얘기가 일반인들에게는 놀랍게 들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으로서는 침략을 위해서나 통치를 위해서나 조선 역사와 사회에 대한 조사·연구가 필요했다. 하야시라는 학자의 <조선사>(1892)와 <조선통사>(1912)가 근대학문의 방법론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사라는 것은 부끄럽지만 정시해야 할 우리 역사학의 진실이다. 중요한 것은 하야시를 비롯한 관변학자들의 역사연구가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결국 일본의 한국 침략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일본의 군사적 팽창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철퇴를 맞았다. 일본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 군대에 점령되었다. 민주주의 평화체제로 나라의 틀이 바뀐 것은 점령국 미국의 강제의 결과였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군림했던 영광의 기억마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심중에는 식민지 지배자의 우월감이 깊숙이 남아 있어서, 망언의 형태로 끊임없이 표출되어 왔다. 패전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3년에 벌써 한일회담 일본 쪽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이 조선에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여 발전에 공헌했다”는 주장을 폈고, 1965년에는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독도는 예로부터 일본 영토라는 데 의심이 없다”고 발언했다. 그로부터 50년, 60년이 지난 아베 정권 아래서 망언은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한-일 관계에서 문제의 핵심은 일본 정부가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의 강압성·불법성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조선총독부는 합법적 통치기관이었고 3.1운동 같은 총독정치에 대한 저항이 오히려 불법이었다. 이 점에서 일본을 대하는 미국과 한국의 시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으로서는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부터 1945년 종전까지만 일본이 범죄국가인 반면에 우리로서는 적어도 1905년 을사늑약부터 40년간 일본이 침략국가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100여년에 걸친 세계사의 무대에서 영국·프랑스·독일·미국 같은 나라들의 행태와 일본의 그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 국민들 다수의 무의식 속에 옛 지배자의 관점, 곧 식민지사관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인관계에서도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의 공격적 심성을 자기화하는 수가 많은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이 경우 내면의 폭력성을 극복하는 것은 가해자·피해자 모두가 새 삶을 얻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민중들은 공동의 과제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진정으로 평화적 민주국가가 되도록 돕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


[1500자 칼럼] 역사(국사) 교과서

● 칼럼 2014. 2. 17. 16:1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 한 해 한국은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아 정신이 없었다. 사람에 따라 관심사가 달라, 무엇을 더 관심있게 지켜보았는지가 다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역사교과서’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국사교과서이다. 그 단어가 주는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나라의 국사라면, 국민에게 정체성과 자부심을 불어 넣어주는 역사여야 한다. 한마디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이 자기 나라 역사교육의 목표다.
나는 한 때 역사를 좋아해서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역사를 전공하느냐 문학을 전공하느냐 를 놓고 망설인 적이 있었다. 결국 역사는 부전공이 됐지만…더욱이 내가 주로 공부했던 분야는 한국, 중국, 일본의 근현대사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힘이 들지만, 이왕 밖에 나와서 서양교수 밑에서 공부하는 것, 객관적으로 보는 눈으로 공부하려 노력하였다.
 
이번에 문제가 된 교학사 교과서를 직접 구해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올라 온 것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친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독립된 한 나라의 국사 교과서에서 식민지 시대를 통해 근대화가 됐고, 더 잘 살게 됐다는 이론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 한국에 철도를 놓아줌으로 인해, 한국 사람들은 먼 곳으로 여행도 가능하게 됐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서양역사 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한국은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단검이다.” 아마 그는 한국이 놓여있는 지정학(Geopolitics) 때문에 그런 말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은 중국에게 있어 ‘등을 노리는 단검”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반도,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이다. 이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이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몽고의 일본 침략과 임진왜란을 제외하고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조 말에 들어와서,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동양 3국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려면, 반드시 한국을 거쳐야 한다. 러시아가 대양으로 뻗어나가려면 또 한국을 거쳐야 한다. 해방 후에는 미국과 소련까지 합세해, 보이게 보이지 않게 한국을 사이에 두고 영향력을 행세하려 한다. 오늘날 중국과 미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또 중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에 철도를 놓은 주된 이유가 자신들의 대륙 침략에 군인을 이동시키고 공급선을 만들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 한국사람들의 먼 곳으로의 여행을 위한 것일까? 지도를 보아도 일본이 왜 철도를 놓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만주로 가는 최단거리로 철도가 놓여있다. 그리고 당시에 대한민국 국민의 몇 퍼센트가 한가롭게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었는지, 그 때의 상황에서 보았을 때 몇 명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일본식민지가 됨으로서 빨리 근대화가 되고 더 잘 살게 되었다는 논리에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 아프리카는 어떠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됨으로 근대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더 잘 살게 되었다면, 그들은 계속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야 할까? 한국이 일본이 없었다면 근대화가 될 수 없었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요지다. 당시 중국은 물론, 러시아도 노리고 있었고, 그 밖의 나라들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노리고 있지 않았는가? 한국의 경제 발전도 그렇다. 일본은 인적 자원이나 물적 자원이 넉넉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에 초기에 기습적 공격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장기전으로 계속 전쟁을 수행하기에 국가적으로 인적 물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자신들 능력이상으로 벌려 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의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강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말기의 우리의 경제는 그들의 전쟁 물자를 보급하는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 기간에 한국의 경제가 발전했다는 한국사 학자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일본의 국사학자라면 모를까? 또 일본의 적지않은 일본사(국사) 학자들은 지금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기간이 있어 한국이 근대화 되었다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