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친구들 중에 아버님의 사업이 기울어 1980~90년대에 빈손으로 미국으로 이민 온 이들이 두어명 있다. 부잣집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이국땅에서 가게 점원 또는 빌딩 야간청소부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낸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하다. 그러나 20~30여년 지나 그들은 큰 가게를 운영하거나 사업체를 중국, 베트남까지 확장한 사업가가 되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미국이니까, 아버지나 나도 체면 따지지 않고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 (시선 많은) 한국에서라면 꼼짝없이 주저앉은 채로 있었을 것”이라며 “미국은 5년만 열심히 일하니 대부분 기반을 잡을 수 있더라”고.
그러나 그 ‘아메리칸드림’의 역사는 20세기로 종말을 고한 것 같다. 최근 로스앤젤레스에서 여러 한인들을 만났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는 7명 중 1명이 불법체류자(서류미비자)라고 한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무작정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 여전히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2008년 촉발된 미 금융위기가 미국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지만, ‘아메리칸드림’이 깨지기 시작한 건 이미 그 이전부터였던 것 같다. 70~80년대에 엄청나게 쏟아지던 미국 이민자들도 이제는 매년 그 수가 줄어 한인타운에선 한인들만을 상대로 하는 가게들은 이제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가 많다. 열심히 일하면 집 사고, 자동차 사고, 아이들 좋은 대학 보낼 수 있었던 소박한 ‘아메리칸드림’은 이제 대학을 졸업한 자식들이 다시 한인타운으로 유턴해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형태가 늘면서 빛이 바랜다.
최근 퓨리서치 조사를 보면, ‘자식들이 나보다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답한 미국인은 조사 대상자의 47%로 절반이 안 됐다. 미국 경제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인 2009년의 62%보다 더 낮은 수치다. 실질 실직자 2600만명, 국민 8명 중 1명이 ‘푸드 스탬프’(저소득층 식품지원)를 받는 곳에서 ‘희망’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은 정서적으로 빈부격차에 덜 분노하는 나라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영화 ‘파 앤 어웨이’를 보면, 어느날 사람들이 주인 없는 넓은 벌판(오클라호마)의 출발선에서 총소리에 달려가 깃발을 꽂으면 그 일대의 넓은 땅이 자기 땅이 되던 서부개척의 역사를 지닌 미국은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그런데 미국 센서스 통계를 보면, 1979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인 소득 상위 1%의 소득은 275% 늘어났는데, 같은 기간 하위 20%의 소득은 18% 늘어나는 데 그칠 정도로 미국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계층 상승 기회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EPI) 자료를 보면, 점수가 낮은 고소득 가정 학생보다 점수가 높은 저소득 가정 학생이 대학을 중도포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가 회복되더라도 지금의 경제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7년 상원의원 시절 “아메리칸드림을 재생시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지금도 그 말을 반복하고, 앞으로도 반복하게 될 것 같다.
< 권태호 - 한겨레 신문 워싱턴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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