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제기된 의혹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는 ‘출생의 비밀’도 있었다. 이 후보가 다른 형제들과 다른 핏줄일 가능성,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 혈통’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후보 쪽은 검찰한테 디엔에이 검사까지 받아 해명하는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의혹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부계 혈통을 검사하려면 디엔에이 와이(Y)염색체를, 모계 혈통을 조사하려면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 염기서열을 조사해야 하는데 검찰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 밝히지 않았다는 둥 뒷말이 계속 무성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이런 주장에 별로 믿음이 가는 편은 아니다. 지나친 상상력의 발로 아닌가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지만 그 뒤 이 대통령의 ‘친일 행보’를 둘러싼 논란이 빚어질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게 이 핏줄 의혹이다. 그러면서 대중의 집단적 예지력이 무섭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 대통령의 친일 행보를 미리 내다본 대중의 예감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핏줄에 대한 의혹 제기로 나타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이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는 마침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밀실 추진으로 정점을 찍었다. 어떤 무리수를 써서라도 협정을 체결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미국이 동북아 전략 차원에서 한-일 군사협력을 끊임없이 종용해온 것은 세상이 아는 사실이지만 협정 추진의 속도와 방식은 상식을 뛰어넘는다.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핏줄 의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친일 핏줄 문제를 따지자면 이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람과 집단이 많다. 이 땅의 수구언론, 보수세력들의 혈관 속에는 친일의 피가 맥맥이 흐른다. 한-일 정보협정의 비공개 추진 사실이 드러난 직후의 반응부터가 그렇다. 놀랍게도 28일치 아침 <조선일보>에서는 이 기사가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6면의 조그만 상자기사가 고작이었다. <중앙일보> 1면 머리기사는 ‘북 핵·군사 정보 일본과 공유한다’는 제목이 말해주듯 긍정 일색이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1면에서 비공개 처리를 문제 삼았다. 새누리당은 한술 더 떴다. 대변인 논평을 통해 “반일 감정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정부를 두둔했다.
이 땅의 평범한 백성들은 한-일 군사협력이라는 말만 들어도 일단 주먹부터 불끈 쥔다. 그것이 보편적 정서다. 국익과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음 문제다. 게다가 정부의 밀실처리가 들통난 상황에서는 흥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럼에도 아무런 분노도, 수치도, 의아스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그 놀라운 무감각의 원천은 어디인가. 일본과의 군사협정이 안보에 불가결한 요소라는 믿음이 너무 굳센 탓인가. 별로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참여정부 마지막 해 노무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남북정상회담 성사였다. 임기 말을 맞은 이명박 대통령이 노심초사하는 목표는 한-일 군사협력 성사다. 그것이 두 사람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수세력이 참여정부 말기 때 자주 쓰던 단어가 ‘대못질’이었는데 이 대통령은 지금 그 대못질의 망치를 높이 들었다. 이 위험천만한 못질이 앞으로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정부는 스스로 한-일 정보협정 밀실 추진의 절차상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정부 안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나의 책임’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엊그제 일어난 일도 책임을 지지 않고 뒤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바로 이 정부 사람들이다. 하물며 미래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이들에게 어떤 책임을 기대할 것인가.
이제 많은 사람의 시선은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한테 향한다. 이 협정의 향방에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 의원이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국회가 개원했으니 상임위에서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며 절차적 투명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협정에 대해 찬성인가 반대인가라는 본질적 문제는 의문부호 상태로 남겨두었다. 박 의원의 핏줄은 어디에 맞닿아 있을까.
< 한겨레신문 김종구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