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성탄선물  “윤석열 탄핵되고 김건희랑 같이 수감되는 것”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24일 개최한 ‘메리 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 다시 만들 세계’에 참석한 시민이 트리 복장을 하고 인사하고 있다. 김가윤 기자
 

“저는 노래할 때마다 이 노래는 세상의 모든 약한 사람한테까지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여러분이 약자와 연대해서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성탄 전야인 24일 밤 경복궁 앞에 가수 하림의 바람과 노래가 전해졌다. ‘슬퍼도 울지 못한 채 살아온’ 이들에게 “눈물 흘려요” 말하는 노래 ‘위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진씨 아빠 최정주씨가 만든 ‘별에게’가 이어졌다. 노래에 맞춰 각양각색 응원봉과 촛불은 잔잔히 흔들렸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24일 개최한 ‘메리 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 다시 만들 세계’에 참석한 시민이 산타와 루돌프 복장을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가윤 기자
 

이날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연 ‘메리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 다시 만들 세계’에 시민 10만명(주최 쪽 추산, 저녁 9시 기준)이 모였다. 시민들은 12·3 내란 사태 이후 여느 날처럼 기발한 복장과 손팻말을 쥔 채 거리로 나왔다. 성탄 전야답게 416합창단,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퀴어페미니스트 댄스공간 루땐, 하림 등의 공연이 집회 무대를 메웠다. 수사와 탄핵심판을 회피하는 윤 대통령과 이에 동조하는 듯한 한덕수 권한 대행에 대한 분노는 한결같이 일렁였지만, 평소보다 한층 더 내란 사태 이후 함께 거리를 지켜온 서로에게 고마움과 위로를 전하는 시민이 많았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24일 개최한 ‘메리 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 다시 만들 세계’에 참석한 시민이 자신이 만든 트리 모양 모자를 쓰고 있다. 김가윤 기자
 

트리 모양 복장을 입은 여아무개(30)씨는 ‘지친 국민 안아드립니다’라는 손팻말을 붙이고 시민들을 하나둘씩 안아줬다. 여씨는 “모두가 기쁜 날이어야 하는데 마음이 우울해서 나왔다. 다른 분들한테도 조금이라도 웃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산타 복장에 흰 수염을 붙이고 나온 이주영(26)씨는 “힘이 되어주려고 집회에 나갔다가 오히려 제가 힘을 얻는다. 혼자 집에서 불안해하는 것보단 같이 있으니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무대에 오른 양옥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은 지난 주말 남태령에 모인 시민을 떠올렸다. 양 회장은 “서울을 가로막은 벽 앞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응원봉의 맑은 물결과 시민들의 눈빛은 그 자체로 희망이었다. 우리는 이미 승리를 경험했다. 잡은 손 굳게 잡고 추위를 견디며 나아가자”고 외쳤다. 전남 함평에서 혼자 왔다는 김진(29)씨는 “시위는 처음이라 두려웠는데 비슷한 또래 친구들이 와서 좋아하는 음악에 방방 뛰기도 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더라. 지치지 않고 항상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24일 개최한 ‘메리 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 다시 만들 세계’에 참석한 시민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가윤 기자
 

이들에게 ‘성탄 선물’은 무엇일까. 루돌프 코를 달고 나온 채서빈(25)씨는 “윤석열이 탄핵되고 두 부부가 같이 수감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면서 채씨는 “더 나아가서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농민처럼 다양한 소수자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꼽았다. 루돌프 복장을 입은채 봉사활동을 하다가 왔다는 안아무개(34)씨는 “윤석열의 빠른 파면과 김건희의 빠른 특검, 내란 가담자들에 대한 합당한 처벌, 그리고 연대하는 시민들이 모두 행복하는 날이 오는 것이 선물”이라고 말했다. 김아무개(50)씨는 “윤석열 체포, 올해 성탄절 선물은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고 했다.

집회를 마친 시민들은 경복궁 동십자각부터 시작해 국무총리 공관을 거쳐 안국역 인근 헌법재판소까지 행진을 이어갔다.                   < 한겨레 김가윤 기자 >

 

"새 방언(方言)이 터진 시대, 새 술은 새 부대에"

[성탄절 메시지] 윤석열 체포해야 메리 크리스마스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메리퇴진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에서 시민들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2024.12.24. 연합

 

하나님 나라는 다름 아닌 인민의 나라이며, 인민이 주인되는 세상

본문 : 마태복음 2장 1절-3절/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

성탄의 인사: 윤석열 체포해야 메리 크리스마스, 윤석열 파면해야 메리 크리스마스

2024년 성탄절 인사 드립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가수 백자의 “탄핵이 답이다”가 이제 “파면이 답이다”, “체포가 답이다”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윤석열 체포해야 메리크리스마스”, “윤석열 파면해야 메리 크리스마스”도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이 곧 복음입니다. 올해 성탄절은 우리가 1차 승리했다는 감격으로 그 기세가 사뭇 다른 감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악의 뿌리가 뽑힐 때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믿음이 기독교에는 있습니다. 광주의 피가 비상계엄의 총구와 군화발로부터 우리를 구했다는 고백을 한 순간, 이 십자가의 구원이라는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들 모두가 더욱 뚜렷하게 알게 한 올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해 핍박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던진 이들의 희생이 산 자를 지켜내고 살려내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이들의 목숨, 그 생명을 지켜냄으로써 죽은 이들이 부활했습니다.

이 시대의 십자가들

광주는 우리 역사의 십자가가 되었고, 그것은 저 멀리 홍경래의 민란, 진주민란,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기세와 맞닿아 있습니다. 일제의 폭력이 자행되었던 시기에 그 무수한 독립투쟁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 땅 도처에 그런 십자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있다는 고인돌처럼 많습니다.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 제주 4.3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제주 한라 숲에서 “이 나무가 모두 묘비명인가”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 땅에 그런 묘비명처럼 세워진 십자가들이 또한 하나 둘이 아닙니다. 폭정의 시대와 맞서 싸운 이들의 혁명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현장이자 기록과 기억들입니다.

헤롯의 폭정과 십자가의 행렬

예수님은 헤롯 때에 태어났습니다. 헤롯가문은 로마제국의 졸개노릇을 하고 있던 식민정권으로 포악하고 잔인했습니다. 예수 탄생 30여 년 전에 갈리리 싶포리아라는 곳에서 히브리 민중들의 민란이 일어나자 로마군대와 함께 대학살극을 벌였던 권력이 바로 헤롯가문이었습니다. 그런 공로로 로마제국의 황제가 그 직위를 내려주는 분봉왕(分封王)이 된 폭군의 시대가 어떠했을지는 뻔했습니다. 헤롯 정권은 식민지 매국 정권이었던 것입니다.

싶포리아 민란은 로마제국의 십자가처형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 노예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아피아 가도에 줄지은 십자가 처형으로 비극의 역사가 되었던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이런 민중의 반란과 그대로 직결되어 있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종교적 사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싸움만이

동방의 박사들은 선지자를 뜻합니다. 이들은 고통에 빠져 있던 히브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과 생명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유다로 옵니다. 그 소식에 온 나라가 야단이 납니다. 헤롯의 권력이 무너질 세상이 조만간 온다는 예언은 특권세력 동맹 모두에게 아찔한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그때가 언제인지 캐물어 새로운 세상의 싹을 잘라버립니다. 하지만 그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누구도 찍어 내릴 수 없듯이 성탄의 감격은 땅의 권력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지독한 탄압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악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이들의 길만이 정의와 승리의 길이 됩니다.

 

대학생진보연합 노래 동아리가 촛불집회에서 캐럴을 개사해 "윤석열, 김건희 없어져라 메리크리스마스"라고 노래를 불렀다. 2024.12.21. 이호 작가

혁명을 노래하는 마리아의 기도

그 싸움의 시작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기도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6절-55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학살의 범죄국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그러니까 힘이 없어 이리 몰리고 저리 찢기고 강한 자들에게 짓밟혀 힘겹게 살아가는 비천한 이들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입니다. 마리아의 기도는 혁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혁명의 모태, 인자(人子)는 인민의 아들

이 혁명의 길은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고 전한 여인들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누구나 이들의 증언을 쉽사지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건 당대의 사유,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혁명의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혁명의 모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걸 그대로 뜨겁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혁명이 여성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민 가운데 인민입니다. 그 존엄성이 짓밟히고 억눌린 이들의 존재가 새로운 세상을 잉태하고 태어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했습니다. 흔히 해석하듯 사람의 아들이 아닙니다. 오클로스, 인민의 아들입니다. 그가 말하고 하려는 것은 모두 오직 하늘의 뜻이 이 땅, 인민들의 삶에서 실현되는 것 뿐입니다. 광주의 딸과 아들, 제주 4.3의 딸과 아들이 모두 인민의 딸과 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인민의 나라이며, 인민이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새로운 방언, 혁명의 언어가 터졌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영이 내리자 사람들이 방언(方言)을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방언은 각 지역의 언어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방언이 아닙니다. 많은 한국교회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옳지 않습니다. 기만입니다.

당대의 지배언어는 로마제국의 언어였습니다. 이는 폭력과 명령, 지배와 군림, 배제와 폭력의 언어였습니다. 이 통치세력의 언어에 짓눌려 있는 이들의 언어가 바로 방언입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 말을 배운 적이 없는 이들의 입에서 그 말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촛불문화제에서 10대, 20대, 30대의 시민발언에서 이 방언이 터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마음에 가두었던 말들, 가슴 속에 꽁꽁 묶어두었던 사연들, 밀실의 말들이 광장에 쏟아져 나옵니다. 혁명의 언어들이 잇달아 폭포처럼 터져 나옵니다. 이 시대의 영이 내려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동양학만이 아니라 성서연구에도 일가를 이룬 도올 김용옥 선생이 촛불행동의 투쟁을 보면서 “영감의 열기가 모아진 곳에서 혁명이 이루어진다”고 격찬과 응원의 말씀을 해주신 바 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 성령 사건, 거룩한 영의 힘으로 방언이 터지는 현장을 우리는 놀라운 마음과 경외감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올해 성탄의 복음 : 우리가 혁명이 되었다

그 방언이 터지는 역사는 이 시대를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이요, 모든 거짓과 폭력으로 세운 성채를 불태우고 새로운 생명을 기르는 불길이며 혁명의 본진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어떤 이가 “저들은 술에 취했다”고 비아냥댄 것을 적고 있습니다. 이 또한 옳습니다. 비아냥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술이 옳다는 것입니다. 새 술에 취해 터진 방언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낡은 것도 이 새 술을 담지 못합니다. 그러고자 하면 그 낡은 부대가 터지고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건 혁명입니다.

올해 우리 성탄의 가장 큰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혁명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마련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 김민웅 촛불행동 대표 >

 

 

"윤석열이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 불안하다"  호소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뒤 4일 새벽 국회 앞에서 군용차량을 시민들이 둘러싼 채 막아서고 있다. EPA 연합
 

“비상계엄이 선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 늦은 시간에 90살이 다 된 동네 어머님들이 하나둘씩 찾아오셨어요. 어디로 숨어야 하느냐고 묻는데, 저도 사지가 떨리더라고요.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우리는 아니까….”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뒤 광주에서 계엄군의 폭력과 학살을 직접 목격한 양재혁 5·18 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은 지난 3일 또다시 그날의 악몽을 떠올렸다고 했다. 12·3 내란사태로 계엄군이 국회로 들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며 “그 끔찍한 역사가 다시 펼쳐지리라고 상상도 못 했다”고 토로했다. 사태가 안긴 충격은 그로부터 20여일이 지난 24일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양 회장은 이날 한겨레에 “혹시나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안이 인용되지 않을까 봐, 윤 대통령이 복귀해 2차 계엄을 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심장이 벌렁거려 잠들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12·3 내란사태는, 5·18과 더불어 양 회장에게 한순간 충격을 넘어 지속적인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경험이 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 전날인 지난 13일 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이아무개씨가 헬리콥터가 여러 대가 국회로 향하고 있다며 한겨레에 보내온 사진.
 

24일로 12·3 내란사태가 벌어진 지 20여일이 지났지만 시민들의 충격은 지속해서 이어지는 모양새다. 믿고 있던 일상과 사회 체계가 대통령 한명에 의해 무너질 뻔한 경험을 한 가운데, 치유의 첫 단계인 윤 대통령과 여당의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12·3 내란사태 이후 잠을 뒤척이며 관련 뉴스를 찾아보거나, 헬리콥터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고 전했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이아무개(57)씨는 지난 13일 밤 11시께 한겨레에 헬리콥터 여러 대가 국회 쪽으로 향하는 것 같다는 제보 전화를 했다. 그는 “한밤중에 헬리콥터 소리가 계속 들려 궁지에 몰린 윤 대통령이 2차 계엄을 준비하는 걸까 봐 걱정돼 제보를 했다”며 “다행히 아무 일 아니었지만 직무 정지된 상황이라도 윤 대통령이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 불안하다”고 호소했다.

국회에서 상황을 가까이 지켜봤던 이들의 공포는 더 크다. 3일 밤 다른 보좌진과 국회 본청을 지킨 김재상 비서관은 “비상계엄을 겪은 뒤부터 막연한 상상을 많이 하게 된다”며 “출근할 때 국회 경비대를 보면 지금은 이들이 국회 정문을 지키고 있지만 언제 우리를 막아설지 모르고, 어떻게 제압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인 국회에 무장병력이 진입하면서 사회적 약속이 깨졌다는 충격 탓에 후유증이 지속되는 것 같다”고 했다.

‘대북 도발’이나 ‘사살’ 등 계엄과 함께 실제 목숨을 위협하는 조처까지 언급됐던 정황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며 공포와 불안의 크기가 커진 면도 있다. 내란 사태 당일 국회 앞으로 달려갔던 직장인 김홍민(29)씨는 “계엄군이 국회에 들이닥치는 걸 보고 유혈 사태로 번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당시에도 긴장을 많이 했다”며 “이후 실제 북한과의 국지전까지 벌이려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는 걸 보고 아찔한 감정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양 회장도 “이번 계엄이 성공했다면 얼마나 많은 시민이 또다시 피를 흘릴 뻔했느냐”며 “이 땅에 다신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 한겨레 박고은 기자 >

일부 언론 객관과 중립을 내세워 정쟁으로 몰고 가는 고질병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20일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 계획을 검토했다. 경찰만으로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국민의 함성을 막기 힘들다고 보고 공수부대를 투입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대외 신인도 추락과 경제에 미칠 악영향, 특히 서울올림픽이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접었다. 대신 노태우 차기 대통령 후보로 하여금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해 간신히 상황을 수습했다.

그 뒤 40년 가까이 계엄령을 걱정하는 국민은 없었다. 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에서 계엄령 준비설을 제기했을 때 언론에서 “국민을 바보로 아는 괴담”(조선일보)이라거나 “소설 같지도 않은 집단망상”(서울신문)이라고 조롱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전두환도 차마 감행하지 못한 결단을 내렸다.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고 국회를 지키려고 여의도로 달려간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 3항에 따라 군인들의 검열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대다수 신문과 방송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엄령 선포의 무도함과 무모함을 꾸짖고 나섰다. 비록 제대로 된 사과나 반성은 없었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잘못된 국정 운영 방식을 비판하는 칼럼도 줄을 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표결을 놓고 여야의 의견이 갈리고 여의도의 탄핵 촉구 집회에 맞서 광화문에서도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자, 일부 언론에선 객관과 중립을 내세워 정쟁으로 몰고 가는 고질병이 재발한 것이다. 더욱이 조기 대선으로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계엄은 잘못이지만 야당의 입법 폭거와 이재명 방탄 탄핵도 문제다”라는 양비론을 펴고 있다. 내란 관련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이나 제 논에 물 대기 식 주장을 아무런 검증이나 반론 없이 중계방송하는 행태도 나타난다.

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서류 받기를 거부하며 시간을 끄는가 하면 경호처도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눈을 부라리며 복귀하면 언제든 또 계엄을 선포하겠다는 기세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 총리마저 지연 작전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이고,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탄핵이 기각되면 찬성 표결한 의원들을 직권남용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언론이 불법 계엄에 일관되게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싶다. 대학생 때까지 아버지한테 고무호스로 맞았다는 윤 대통령이야 워낙 고집불통이어서 어쩔 수 없다 쳐도 대통령실이나 총리나 여당은 여론에 귀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2016년 10월 티브이(TV)조선은 ‘최순실 의상실 영상’을 공개해 한겨레, 제이티비시(JTBC)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주도했다가 박근혜 열성 지지층의 항의에 직면했다. 비슷한 일이 재연되는 것을 우려해 진실에 눈감고 시대적 책무를 외면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그런 언론이 정당에 “국익을 생각지 않고 당리당략에만 매달린다”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계엄은 잘못됐지만 탄핵엔 반대한다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는 윤석열이 물러난 뒤의 일이다. 아직은 언론이 양비론 뒤에 숨거나 뒷짐 지고 훈계할 때가 아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른 데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탄핵 막으려다 내란 공범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여당의 운명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이미 시민들은 그런 언론에도 단죄의 칼날을 겨누고 있다.             <  이희용  언론인 >

 

“계엄군, 선관위 점거 충격…윤 대통령이 밝힌 이유 도무지 이해불가”

'윤석열이 임명한 동기출신' 김용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 대담

 

             김용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24일 경기 과천시 중앙선관위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김용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65)은 춘천지방법원장,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사법연수원장 등을 역임한 법관 출신이다. 33년간 판사로 재직하면서 지역 선관위원장을 맡은 경험이 있으며, 지난해 7월 대학 동기인 윤석열에 의해 사무총장에 임명돼 논란도 있었다. 선관위 출신이 아닌 외부 인사가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것은 35년 만에 처음이다. 사무총장은 선관위 실무를 총괄하는 장관급 자리다.

 

지난 12월3일, 대통령 윤석열의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충격적이었다. 무슨 이유로 계엄을 꺼내들었는지 짐작조차 어려웠던 그날 계엄군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투성이던 이번 계엄 사태 미스터리는 12일 윤석열의 대국민 담화를 통해 어이없이 해소됐다.

“그동안 직접 차마 밝히지 못했던 더 심각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년 하반기 선거관리위원회를 비롯한 헌법기관들과 정부 기관에 대해 북한의 해킹 공격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핵심인 선거를 관리하는 전산시스템이 이렇게 엉터리인데, 어떻게 국민들이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번에 국방장관에게 선관위 전산시스템을 점검하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0.73%포인트 차 대선 신승과 총선 참패 후 일부 유튜버나 극성 지지자들이 제기하던 부정선거 음모론이 현직 대통령 입을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그의 담화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윤석열과 지지자들은 내란의 위헌성을 희석하기 위해 부정선거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다.

24일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만난 김용빈 사무총장은 부정선거 음모론이 선관위 공격에 그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제도 자체를 형해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극화된 정치 상황과 (유튜브 등) 미디어 알고리즘을 통한 확증편향”이 부정선거 음모론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관위가 저지르는 개별적인 잘못이나 실수를 질책하시더라도,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성과 선거 공정성 자체를 의심하진 말아달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헌재나 내란죄 수사당국 요청 땐 서버 검증에 응할 용의 있지만
설계도·소스코드 등 노출되면 당장 내년 재·보궐 선거 못 치러

국정원에 모든 접근 권한 줬지만 해킹·조작 흔적 전혀 찾지 못해
분류기의 정확성은 이미 입증 모든 투표지 수검표 절차 도입

미디어 알고리즘 통한 확증편향 숱한 음모론에 불쏘시개 역할
선관위 개별 잘못 질책하더라도 공정성 자체 의심하지 말기를

비상계엄 비상근무 지침도 전달 안 돼

- 지난 3일 밤 계엄군이 선관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이 계엄이 부정선거 음모론과 관련 있을 거라고 짐작하셨나요.

“전혀요. 집에서 TV로 계엄령이 선포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지만, 계엄군이 선관위에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설령 계엄사령부가 행정·사법 업무를 관장하더라도, 선관위는 독립적인 헌법기관이고 사령부에 이관할 업무 자체도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원래 비상사태가 되면 비상근무 지침이 전달돼야 하는데 청사에서 아무 연락도 안 오는 겁니다. 청사 근처에 사는 선거정책실장이 ‘직접 청사에 가보겠다’고 하더니, 밤 12시쯤 전화가 왔어요. 계엄군에게 청사가 점거당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당직 직원들은 모두 휴대폰을 뺏긴 채 격리돼 있어서 연락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계엄군이 선관위를 점거한 이유는 저도 뒷날 대통령 담화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대통령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여전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내란 수사를 통해 계엄 세력이 선관위 직원 수십명을 감금하기 위해 케이블타이와 복면을 준비하려 했던 정황까지 드러났습니다. 직원들의 불안감도 클 것 같습니다.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계엄군이 선관위에 들이닥쳤던 날 당직 근무했던 직원 5명은 물론,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직원들에게 정부 기관이 운영하는 심리·상담 치료센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해놓은 상황입니다.”

선관위에 투입된 군인은 과천·관악 청사와 선거연수원까지 모두 합해 300명에 달한다. 계엄군이 투입된 시간은 지난 3일 오후 10시30분쯤으로, 윤석열이 TV 생중계로 긴급 대국민 성명을 낭독하기 시작한 지 불과 6분 만이다. 이들은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된 후에도 한동안 청사에 남아 있다 3시간20여분 만에 철수했다.

- 계엄군이 철수한 후 폐쇄회로(CC)TV 등을 통해 계엄군 동선을 확인하셨을 텐데, 구체적으로 파악한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 선관위 시설이 피해를 입은 것은 없습니다. 서버에 접속해 자료를 반출한 흔적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다만 계엄군이 특정 서버의 사진을 찍어갔는데, 사전투표에 사용되는 통합선거인명부 관리 서버입니다. 사진 찍는 행위 자체만으로 서버에 영향을 미칠 순 없지만, 해당 서버 위치 노출로 인한 보안 우려는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외부 불순 세력이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특정 서버의 탈취가 더 용이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서버 위치를 재배치하는 방안도 고려했지만, 재배치에만 20억원의 추가 예산이 든다고 합니다. 전문가 자문 결과 당장 심각한 보안 위기가 발생한 건 아니라서, 다른 대책을 세워 보안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서버 외부와 완전 분리, 해킹 원천불가

- 대통령은 담화에서 지난해 하반기 선관위가 북한의 해킹 공격을 받았고, 국가정보원이 실제 해킹을 시도해보니 데이터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선관위가 해킹 공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선관위 서버는 외부와 완전히 분리돼 있는 폐쇄망이어서 외부에서 망을 통한 해킹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지난해 국정원·한국인터넷진흥원과 합동으로 진행한 보안 컨설팅에서도 해킹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국정원 점검 결과 방화벽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비밀번호도 ‘12345’로 단순해서 해킹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했지만, 그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국정원 모의 해킹은 방화벽이 뚫린 상황을 가정하기 위해 저희가 모든 보안조치를 일시적으로 해제해준 상황에서 진행한 겁니다. 또 비밀번호 등 보안 컨설팅에서 지적된 취약점은 모두 즉시 보완해 각 정당 참관인 입회하에 이행 여부까지 점검을 완료했고요.”

- 대통령실과 국정원은 당시 보안 컨설팅 점검 범위가 전체 선관위 전산장비 6400여대 중 317대(5%)에 국한됐기 때문에,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선관위는 보유하고 있는 전산장비에 대한 모든 접근 권한을 국정원에 부여했습니다. 저희가 제한한 게 아닙니다. 국정원이 중요 장비 위주로 범위와 대상을 선정해 보안점검을 실시한 겁니다. 전체 6400여대 중 317대라고 하면 숫자상 적어 보이지만, 저 6400대에는 전체 선관위 직원들의 일반 컴퓨터가 포함돼 있어요. 선관위 직원들은 모두 컴퓨터가 두 대씩 있는데 하나는 외부 접근이 불가능한 내부 폐쇄망, 다른 하나는 인터넷이 연결되는 외부망입니다. 외부망 컴퓨터에는 중요 정보가 없습니다. 국정원이 조사한 317대에는 선거정보를 관리하는 담당 부서 직원들의 내부망 컴퓨터와 상당수 서버가 포함돼 있었을 겁니다. 국정원은 점검 당시 전체 서버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실제 대부분 서버를 다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해킹·조작 흔적을 못 찾은 겁니다.”

- 그동안 부정선거론자들은 ‘떳떳하면 서버를 까라’는 주장을 되풀이해왔습니다. 공개적으로 서버를 오픈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대통령까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마당에, 아예 서버를 공개해 모든 의혹을 불식시키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관위는 법에 의해 국가정보시설로 지정돼 있어서 스스로 국가 기밀정보를 유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지만, 탄핵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나 내란죄 수사기관이 (윤 대통령의 부정선거 주장을 판단하기 위해) 서버를 검증하자고 하면 응할 의사가 있습니다. 부정선거론자들은 서버 안에 통합선거인명부를 조작하는 프로그램 등이 깔려 있어서, 투표를 안 했는데도 한 것으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서버의 보안벽을 전부 허물고 소스코드를 공개하면 그 의혹은 해소할 수 있겠죠. 다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요. 서버 구조, 설계도, 제조사명, 소스코드 등 정보가 노출되면, 그때는 정말 보안이 취약해져서 그 상태로 다음 선거를 치르기 어려워집니다.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서버를 전면 재구축해야 해요. 그리고 서버를 재구축하고 난 다음에는 2년 가까운 안정화 기간이 필요합니다. 게임만 해도 새 버전이 출시되면 베타서비스를 거치잖아요. 그런데 당장 내년 4월2일에 통합선거인명부를 사용해야 하는 재·보궐 선거가 있습니다. 안전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서버로 선거를 치렀다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선거 자체가 불능(무효화)이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어요.”

부정선거 소송, 물적 증거 전무

- 그런데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대한민국 선거는 실물투표로 이뤄지는데, 부정선거론자들의 주장처럼 서버를 조작하는 것만으로 선거 결과를 조작하는 게 가능합니까.

“제가 부정선거론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실물투표에 기반한 우리 선거제도하에서 실질적으로 선거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시군구 선거위원회에서 수기로 작성하는 개표 상황표입니다. 설령 통합선거인명부에 기재된 사람들의 사전투표 결과를 전산상으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치더라도, 누군가를 지우거나 더하면 결과값이 달라지기 때문에 실물투표 개표 상황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어요. 전산으로 조작한 수치와 실물투표지 개표 결과를 맞추는 것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그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부정선거가 이뤄지려면 선관위 내부자, IT업계 전문가, 투표지 인쇄 담당자, 투표함 관리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해야 합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참관인 등의 눈을 피해) 각자 분담한 역할을 007 작전하듯 실행해야 하는데, 그런 인적 증거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런데 21대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해 이제까지 126건의 부정선거 소송이 제기됐는데 하나라도 인적 증거가 나온 게 있습니까. 물적 증거도 나온 게 없습니다. 이제까지 선관위 서버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한번도 발부되지 않은 것은 법원이 편향돼서가 아니라, 서버 검증이 필요할 만큼 혐의가 소명된 게 하나도 없어서예요. 저희가 서버를 보호하려는 것은 부정선거를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걸 공개하는 순간 다음 선거 때 보안 대책을 마련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 부정선거론자들은 투표지 분류기에 대한 해킹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한국에서 투표지 분류기를 수입해간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부정선거가 발생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요.

“투표지 분류기는 수많은 선거 소송을 통해 이미 그 정확성이 입증됐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자꾸 반복돼서 2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아예 선거사무원이 모든 투표지를 일일이 확인하는 수검표 절차를 도입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기계로 자동 분류한 투표지를 곧장 심사 계수기에 넣었는데, 지난 선거 때는 분류기 작업과 선거사무원의 확인, 그리고 심사 계수기 작업까지 투표지를 세 번 확인하도록 한 겁니다. 투표지 분류기 해킹도 사실 불가능합니다. 무선 랜카드도 아예 빼버렸어요. 프로그램 구동을 위해 USB는 안 쓸 수가 없는데 이것도 2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인가된 보안 USB만 인식할 수 있는 매체제어 프로그램을 심어서 보안을 한층 더 강화했습니다.”

- 부정선거 음모론의 역사는 짧지 않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제기돼왔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나서서 부정선거를 언급한 이번 사태는 이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 같습니다.

“2002년에는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이 전자개표 조작설을 제기했고, 2012년에는 진보진영 지지자들이 투표지 분류기 해킹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방송인 김어준씨는 영화 <더 플랜>까지 제작했고요. 이같이 진영을 불문하고 일정한 주기로, 유사한 논리를 동원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의혹에 실체가 없으며 부정선거 주장이 정치적 이유에 따라서 이뤄지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음모론,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위협

- 허위사실에 기반해 반복적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유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부정선거 의혹 제기 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광범위하게 보호받아야 하고, 사회적 자정 기능에 맡기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지금 현대 사회가 데모크라시(민주주의)에서 미디어크라시(대중매체가 막강한 힘을 갖고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로 이전하는 단계라는 겁니다. 미디어의 선동과 인공지능(AI) 알고리즘 때문에 자신이 선호하는 정보만 반복학습하는 확증편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극도로 진영화된 사회에서 이러한 미디어크라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당선되지 않으면 선거 절차 자체를 공격하게 만듭니다. (유튜브 같은)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해 선거관리 업무 자체를 방해할 목적으로 명백한 허위사실을 반복적으로 유포하는 사람을 지금은 현행법상으로 딱히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없습니다. 지금 같은 국가 비상사태에서 당장 공론화는 어렵겠지만 차후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께도 부탁드리고 싶어요. 선관위가 부정선거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지난 22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모든 선거 절차를 보다 더 투명하게 공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전·우편투표함 보관기간 중에는 누구나 보관장소를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CCTV 영상을 24시간 공개하고 있고, 개표날에는 투표함을 차에 실어 개표 현장으로 옮기는 과정까지 모두 생중계하고 있습니다. 선관위 홈페이지나 유튜브 채널에 들어오시면 의문 사항을 언제든 영상으로도 확인하실 수 있으니까,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 사무총장은 선관위도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 나가겠다고 했다. 최근 선관위는 ‘그래도! 이재명은 안 됩니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불허해 논란이 되자 입장을 번복하기도 했다. 그는 “선관위가 개별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나 잘못에 대해 질책하시더라도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성 자체를 의심하지는 말아달라”면서 “부정선거 음모론은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해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위협한다. 선관위도 앞으로 더욱 투명하고 정확한 선거정보 전달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경향 정유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