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흉기’ 예방- 해결책없어 공포

● CANADA 2018. 4. 27. 19:37 Posted by SisaHan

경찰이 조사를 벌이고 있는 범행차량.

일상 기기서 범죄자들 손쉬운 선택‥ 잇달아 참사

23일 토론토의 승합차 인도 돌진 참사와 비슷한 범죄와 테러는 사전 감지가 어려워 공포의 대상이다. 미국 뉴욕과 프랑스 니스에서, 영국 런던, 독일 베를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도 같은 수법의 사건이 있었다.
차량을 이용한 잔혹범죄는 최근 수년간 ‘이슬람국가’(IS)와 같은 극단주의 무장세력의 지시를 받거나 그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외로운 늑대’들이 자주 동원하는 수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미국 온라인매체 복스(VOX) 등에 따르면 안보 전문가들은 차량돌진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이 같은 범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없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있다. 경찰 등 당국이 어떤 차량 운전자가 차를 몰고 인파가 몰리는 인도로 뛰어들 것인지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노려 IS와 같은 테러조직들이 조직원들에게 차량을 동원한 테러에 나서도록 독려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과거에 소개한 IS의 문건 가운데는 “차량은 칼처럼 손에 넣기가 극도로 쉽지만, 칼과 달리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차량돌진 범죄의 위력을 설명한 매뉴얼까지 있었다. 테러리스트이든 정신질환을 앓는 이든 차량을 이용해 얼마든지, 어디에서나 대형 흉악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9·11 테러의 경우 알카에다 조직원 십여 명과 50만 달러(5억4천만원 상당)가 투입됐다. 거의 10년 동안의 치밀한 준비 끝에 감행됐다.이런 종류의 테러에는 이메일과 전화통화 기록, 신용카드 사용 내역, 여행 관련 증빙서류 등이 남는다. 이에 따라 수사당국이 테러 계획을 사전에 감지하고 무위로 돌아가도록 할 수도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차량 이용 테러는 그리 복잡하거나 정교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 수년간 니스, 베를린, 런던, 바르셀로나 등지에서 극단주의자나 정신이상자들의 차량테러가 모방범죄처럼 뒤따른 이유가 있는 셈이다. IS는 시리아 본부의 도움 없이도 오로지 IS의 정신에 의지해 테러를 감행할 수 있는 조직원들을 찾는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이들이나 사회에 불만이 있는 이들, 극단주의에 심취한 이들이 쉽게 ‘외로운 늑대’로 포섭될 수 있다. IS나 알카에다는 차량을 무기화하는 데 도움을 줄 지지자들을 모집한다는 선전을 하기도 한다.
수차례 테러에 시달린 유럽은 인파가 몰려든 행사장 검문을 강화하고 광장이나 인도에 차량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을 대거 설치하는 방식으로 참사 가능성을 줄여가고 있을 뿐이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한인과 시민들의 발길이 올리브공원에 이어지고 있다.

23일 오후 노스욕 영 스트리트에서 대형 밴이 인도로 돌진해 25명의 사상자가 난 사건과 관련, 한국인 2명이 죽고 한인 시민권자 강철민 씨도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사망자 10명 가운데 한인이 3명이나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부상자는 15명 중 한인 중상자는 2명으로, 전체 사상자 25명중 5명이 한인으로 일단 확인됐다.


25살 범인 현장 체포 1급 살인 구속,동기 수사
한인사회 추모물결… 피해자·유족 지원 나서


사건발생 후 현장 부근 올리브스퀘어 공원에 설치된 추모소에는 많은 한인들이 들러 헌화하고 눈물을 흘리며 글을 남기는 등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사건은 오후 1시30분 쯤 세네카 칼리지 대학생 알렉 미나시안(25)이 흰색 렌트카 밴를 몰고 핀치 애비뉴와 영스트리트 인근에서 남쪽 노스욕 시청 방향으로 2㎞ 가량을 시속 60Km이상으로 지그재그로 달리며 행인들을 마구 들이받아 마침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과 유학생 등이 무방비상태로 당했다.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힌 범인 미나시안은 24일 10건의 살인과 13건의 살인미수를 저지른 1급 살인범으로 구속됐다. 현지 경찰은 단순 사고가 아닌 고의적 행위로 보고 테러 여부 등을 조사 중이나 랠프 구데일 연방공공안전장관은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밝혔다. 범인의 페이스북에서 여성혐오성 글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범행동기와 관련 여부를 경찰이 조사 중이다. 만 하루 반 동안 차단됐던 영 스트리트는 24일 오후 늦게 경찰이 통행을 재개시켰다. 이에따라 개점휴업 상태이던 다수의 한인 음식점들도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충격이 워낙 커 고객의 발길은 뜸한 편이다.

한편 한인사회도 충격을 감추지 못하면서 피해자 추모와 피해자 수습지원에 나서고 있다,
토론토 총영사관은 긴급 지원팀을 구성해 경찰과 연락하며 한국인 피해자 확인과 후속지원에 나서는 한편, 영사콜센터에 접수된 한인 17명의 연락처를 확인, 다른 피해자는 없는 것으로 일단 파악했다. 총영사관은 한국에서 급히 방문할 유가족의 영사지원 등에 나설 계획이다.
토론토 한인회는 24일 긴급 지원센터를 개설, 유가족과 부상자 등을 위한 차량지원과 통역 등 서비스를 제공키로 했다. 또 27일 노스욕 멜라스트먼 광장에서 동포 추모행사를 열고 올리브공원까지 행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인회는 25일 오후 1시 긴급 단체장 회의를 갖기로 하는 한편, 모금운동도 계획, 피해자와 유족을 도울 방침이다. 각 교회는 예배와 함께 희생자 추모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일부 한인 장례사는 사망자의 장례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위 질문은 목회하면서 나 자신에게나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한 번쯤 진지하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교회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열심히 봉사하는것, 헌금 생활을 정직하게 하는 것, 예배에 빠짐 없이 참석하는 것, 교회 정책에 순종하는 것 등 아마 각자 그 정의를 다르게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교회를 사랑하는가 보다 교회가 나를 사랑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대표한다고 생각을 하는 대상자들 즉, 목사와 장로 및 직분자들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그에 대한 요구를 하시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교회라는 몸을 구성하는 한 지체라고 여기기 보다 교회를 어떤 조직으로 이해해서 사회생활의 장이자 운영해야 할 곳이라 생각해서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주로 신앙생활 초기에는 교회에 대해서나 신앙에 대해 잘 모르고 다니곤 합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행복해지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정보를 얻고자 하는 기대로 출석하기도 했겠습니다. 초기에는 교회라는 개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이고 당장 자신에게 닥친 급한 불을 끄기 위하여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헌신하기도 할 때입니다.그러다가 시간이 흘러서 문제가 해결이 되고 믿음도 생기게 되면 잘 모르고 있던 교회의 면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많은 ‘교회 사람들’ 도 보이고 그들을 통해 교회라는 대상에 대해 이런 저런 정보와 지식도 늘어가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제대로 된 정의를 ‘성경’을 통하여 배우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과 경험으로부터 들은 정의를 안고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르지 않더라도 한 번 자리 잡힌 개념은 쉬이 교정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예로, 교회의 당회에 대해 목사가 우두머리이고 장로들이 중직이 되어 교회를 다스리는 집단이라고 이야기 하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그와 같은 개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당회를 주시하며 때를 따라 동의도 하지만 견제할 필요가 있는 조직으로 생각해서 힘의 균형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 서로가 교회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같더라도 늘 그 공동체 안에는 일치와 화합보다는 긴장이 있습니다. 여기 부터 신앙생활은 문제가 시작되어 교회에 대한 오해를 고칠 기회조차 만나지 못한 채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교회 생활’하며 인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 사랑’ 은 곧 ‘그리스도를 사랑’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교회의 일원(지체)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은혜를 안다는 것이며 그 은혜가 절대적으로 내게 필요하다고 여겨 그 예수를 의지한다는 뜻이기 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 으로 ‘교인’ 도 되고 ‘교회’ 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철저히 그리스도에 기초해야 하며, 그의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받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무리들이어야 합니다.


이제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네, 저는 교회 곧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교회를 생각하면서 싫증난 목사, 맘에 안드는 장로, 기타 꼴불견인 사람들로 판단하면 교회의 참뜻을 대단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할 뿐 아니라 또 교회를 이루는 성도(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늘 도전을 만나게 됩니다. “저 사람 만큼은 안돼!” 라는 한계에서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기로 의지적인 결단을 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저희 같은 사람을 사랑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셨고 그것이 나타난 것이 ‘십자가의 사랑’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데 힘이드시나요? 맞습니다. 사랑은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은 “참 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주님 부르시는 그 날 까지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견디고 안내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 사랑’ 입니다. 피하거나 도망하거나 돌아서거나 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회피가 아닙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

< 노득희 목사 - 벧엘 성결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청색리본의 꿈

● 칼럼 2018. 4. 24. 17:13 Posted by SisaHan

며칠 봄기운이 완연하더니 오늘은 심술궂은 동장군이 온종일 허세를 부린다. 물오른 나뭇가지에 얼음 꽃을 입혀놓곤 이내 강풍으로 위태롭게 하기도 하고, 때때로 거센 눈보라를 일으키며 온 동네를 거세게 강타한다. 이런 날은 대문 밖 나서기도 꺼려져 집안을 서성이며 혹한의 잔재가 얼른 잦아들기를 재촉한다. 계절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지내기 마련인데, 이번 겨울은 온 마을에 드리운 암운 탓에 그 어느 때보다 해빙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긴 겨울 내내 수많은 사람들이 애틋하게 찾아 헤매던 꼬마 소년이 날이 풀리면 강변 어디에선가 화답 해 올 텐데… 마을 사람들의 간곡한 바램에도 아랑곳없다는 듯 무심하게 이는 바람, 건넛집 정원수에 매달린 청색 리본이 항거하듯 거세게 펄럭인다.


그랜드 밸리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청색 리본이 곳곳에서 나부낀다. 다리난간 혹은 해묵은 나뭇가지 그리고 이웃집 정원 곳곳에 애원하듯 매달린 리본은 마을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파란 가을 하늘의 청정함, 꿈과 희망을 야기하는 검푸른 바다 빛 청색 속엔 깊은 슬픔 또한 내재되어 있음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깨닫는다. 희망과 슬픔을 함께 표방하는 청색 리본의 날갯짓이 허망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사태가 발생한 그 밤을 유추해 본다.
두어 달 전 이 마을에 큰 사고가 있었다. 극한의 추위로 얼어붙었던 강물이 갑작스런 기온상승으로 풀리면서 범람했다. 강 상류에서 부터 숱한 얼음덩이를 동반한 강물이 미친 듯이 하강하는 사실을 알았을 리 없는 한 젊은 댁이 깊은 밤 어린 아들을 차에 태우고 다리를 건너다가 거센 물결에 휩쓸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위에서, 어느 모자(母子)의 생과 사를 엇갈리게 한 참변은 온 마을을 슬픔의 도가니에 들게 했다. 그 밤 홀로 힘겨운 사투를 벌였음에도 끝내 아들을 지키지 못한 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주범은 다름 아닌 자연이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깊은 상처를 안기는 자연의 양면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럴 땐 그저 막막할 뿐이다.


온가족이 지팡이를 들고 강변에 나섰다. 아이가 실종된 지 한 달여, 강물이 빙산되어 비켜 앉은 듯 강폭은 좁고 험난한 얼음바위가 물줄기 따라 이어져 있었다. 사고 지점에서 수 킬로 떨어진 곳임에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은 역력했으나 자연은 방대했고 인간의 발자취는 너무도 미미해 보였다.
우리는 다른 팀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얼음 바위 구석구석을 수색해 나갔다. 그동안 칼바람이 얼마나 난무했는지 무수한 얼음 결이 걸음을 헛돌게 했다. 우리가 하고 있던 그 행위는 넓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식이었지만 쉬이 멈출 수 없었던 점은 자식 찾아 헤매는 아비의 애끓는 절규 때문이었으리라. 비록 큰 힘은 아니어도 마음만은 함께 한다는 심정으로 각처에서 몰려드는 온정의 물결이 오늘도 차가운 강변을 훈훈하게 한다.


요즘 이곳 분위기는 오래전에 읽은 단편소설 ‘노란 손수건’ 이란 작품의 배경을 연상하게 한다. ‘영어(囹圄)의 몸이 된 한 죄수가 오랜 수감 생활이 끝나가자 장래거취를 걱정한다. 마음은 가족이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아내가 받아줄지 고민하다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만약 아내가 자신을 용서한다면 동네 초입 참나무에다 노란 손수건을 걸어달라고. 이를 접한 아내는 흔쾌히 노란 손수건을 나무에 매단다. 그리곤 걱정에 잠긴다. 버스를 타고 올 남편이 혹시 못 보고 지나가면 어쩌나 궁리하던 끝에 여러 장의 손수건을 나무에 매단다. 이런 내막을 알게 된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동참하여 참나무는 곧 노란 손수건으로 뒤덮히고 남편은 그들에게 돌아온다’는 실제 사실을 기초한 내용이다.
소설의 내용과 우리 마을의 현재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 절실한 마음을 밖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의 의지는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봄과 함께 아이의 소식도 훈풍에 실려 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