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선교회 니카라과 연합선교팀원들.


중남미선교회 니카라과 연합선교 다녀와서… 임수택 목사

해마다 단기선교를 다녀오면 잊지못할 추억이 생긴다. 올해도 니카라과 단기선교를 2주 동안 다녀왔다. 11교회에서 모인 51명의 선교팀원들과 함께 매일 섭씨 35도에 이르는 무더위 속에서도 여러 가지 귀한 사역을 함께 감당하고 돌아왔다.
선교가서 전도하고, 기도해주고, 봉사하는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이나 너무나 많이 듣는 일이어서 새로울 것 같지 않아 이번에는 선교지에서 느끼는 사소한 일들이지만 상큼한 시골 추억을 소개해 보려한다.
귀여운 돼지: 니카라과에선 돼지를 풀어 키운다. 집 주위와 동네를 자유롭게 배회하면서 먹이도 먹고, 땅에서 뒹굴면서 논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앞으로 아기 돼지 두 마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지나간 모습이 그립다.


코코넛 나무: 우리가 묵었던 여관 집 마당에 코코넛 나무가 높이 솟아 있다. 토론토에는 자라지 않는 나무인지라 우리 눈길을 더욱 끈다. 주인에게 청하니 코코넛 열매를 흔쾌히 따다 준다. 현장의 코코넛의 맛은 마켙에서 사먹는 캔과 비교가 안된다.
트럭타기: 캐나다에서는 트럭 뒤에 사람을 태우고 자동차가 달릴 수 없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변변찮은 니카라과에서는 트럭 뒤에 사람이 한 10명씩 타고 다닌다. 우리 중에 몇몇은 트럭 뒤에 타 보기로 했다. 달리는 차의 속도만큼이나 온 몸에 바람을 받으며, 노래를 불렀다. 10대 청소년으로 돌아 간 듯하였다.
망고먹기: 선교가면 날마다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축호전도다. 열대지역 시골집에 들어가면 커다란 망고 나무가 많이 있다. 그늘도 좋고, 열매도 먹을 수 있어 그만이다. 현장에서 먹는 망고의 향이 입안 가득하다.
징검다리: 시골 마을을 들어가려면 종종 개울물을 만난다. 도시에서처럼 철이나 시멘트로 된 교량은 없다. 어떡하지 하고 둘러보면 여기저기 놓인 돌다리 징검다리가 있다. 혹시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건넨다. 개울물을 건너고 나서 뒤돌아보면 돌다리를 만들어 놓은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겨난다.


자녀 7명: 한 집에 들어가 교회 특별예배에 오라고 초청을 했다. 그랬더니 자기들은 바빠 못 가고 아이들을 보내겠다고 했다. 아이가 몇 명이나 되나 물었더니 7명이란다. 7명 모두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구두를 신겨 교회에 보냈다. 부모님의 정성에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
흙바람: 한 정착민 마을에서 이틀간 사역하기 위해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나무나 풀이 없어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새까맣게 날라 온다. 처음엔 물휴지로 수없이 몸을 닦았지만 점심 때가 되자 모두들 닦기를 포기했다. 땀이 나고 흙먼지가 묻어 저녁이 되자 원주민과 같이 새까맣게 되었다. 그런데 닦기를 포기한 후 몸은 더러웠지만 마음은 하염없이 자유로웠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80명의 현지인 목회자세미나와 1,000명의 어린이에게 VBS 사역과 의료사역과 1,500명의 현지인에게 전도집회를 제공하는 단기선교를 대성공적으로 마쳤다. 돌아오는 귀국 길에 토론토에서 참가한 11학년 학생에게 “넌 이번 선교를 통해서 뭘 느꼈니?” 하고 내가 물었더니 “목사님! 저는 선교지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난 후 저 자신에 대한 불평이 싹∼없어졌습니다. 이제부터는 감사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허허 이번 선교의 최대 수혜자는 자네 자신일세. 앞으로 선교지에서 배운 교훈을 잘 간직하고, 살아가게” 라고 당부했지만 그 말은 내 자신을 향해 매 해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 필자 : 갈릴리장로교회 담임목사 >



가장 능력있는 간구는 “말할 수 없는 탄식 (롬8:26)” 으로 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명령을 내려서는 안되며 간절한 요청을 해야한다.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과 존경과 신뢰로써 주님에게 다가 가자! 주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처지와 필요를 더 잘 아시는 아버지시다. 우리는 은밀한 곳에 계시는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자! 은밀한 기도를 할때 그곳이 골방이 되고 특히 우리가 “그를 부를때” 우리 곁에 계시는 곳이 골방이다. ‘네 골방’이란 즉 개인적이고 외진 장소에 “들어가라”란 뜻이고, 이삭은 들판으로 갔고, 그리스도는 산으로 가셨으며, 베드로는 지붕위로 올라갔다. 즉 겉치레를 피하기 위하여 은밀한 곳에서 수행된다. 산만해지지 않고, 또한 들리지 않음으로써, 보다 큰 자유를 활용하기 위하여, 은밀한 곳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자선은 인간의 역사’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다>.


제사장과 레위인 처럼 모세의 율법 즉 율법의 사역자들이 우리를 보았으나 도와 줄 어떤 동정심도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해 주지도 않고, 위로도 해 주지 않고 다른길로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때에 축복의 예수님 즉 선한 사마리아인이 오셔서 우리를 동정해 주시고 피 흘리는 상처를 싸매 주셨다(시편147:3, 사61:1, 눅10:33-34). 일반적으로 복음의 목적은 비록 연약 할지라도 신실한 자에게 용기를 주는 구원의 방법을 확립시키는 것이다. 복음은 이유없는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의롭고 자발적인 마음을 받아들인다. 주님을 온유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떨면서 따르는 특별한 사람들에 대하여 즉 참된 은혜를 소유한 자들을, 비록 그들이 연약하다고 할 지라도 주님은 사랑으로 품어주신다. 항상 “진리는 위대하며 승리할 것이다”. 가장 불결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불결함을 비난 하는데 앞장을 서는 법이다. 바리세인들의 오류와 반감, 표리부동한 심사, 잘못과 악으로 점철된 사람이 바로 내자신이 아닐까요? 그런고로 성하지 못한 눈은 밝은 빛을 볼수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진리를 은폐하는 사람들을 기뻐하거나, 그들의 오류와 타락함으로 빠져 들어가기를 즐거워 해서는 안된다.


항상 진리는 소유(인정)되어야 하고 의무는 행해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고의적으로 무지한 자를 거절 하시지만, 기꺼히 배우려고 하는 무지한 자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가지신다. 우리는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 이상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 것이 또 없기 때문에 예배없는 신앙생활은 ‘지붕위의 참새처럼 고독한 몸’이 되기 십상이 되며, 영적인 신앙인 으로부터 멀어져서 변화무쌍한 세상 파도에 휩쓸려 세상 사람의 웃음도 믿을 수 없으며, 오늘 모든 사람으로 부터 환대 받는 사람도 내일 날에는 모든사람으로 부터 배척을 받을 수 있다. 성령의 검과 믿음의 방패를 가진 신자들은 결코 무장을 풀어 놓거나 또는 언제든지 그것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를 힘입고,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가요! 그리스도인은 사역자들의 가르침이 기록된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그들에게 더욱 복종해야한다. 사역자(목회자)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정직하게 양육 해야만 하고, 목자로서의 소임의 모든 부분을 잘 감당해야 될줄 믿는다.


그리스도의 양들을 푸른초장으로 인도해야하며, 그들 앞에 선한 먹이를 놓아 주어야 하며, 병이 난 것들이나 식욕을 잃은 것들을 최선을 다해 치료 해야만 된다. 부드러운 복음주의적인 훈련과 함께 기독교의 가르침을 골고루 먹여 그들을 양육해야 될 줄 믿는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이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존재로 자라는데 필요한 것이 결핍되지는 않았는지 보아야한다. 사역자는 울 밖에 있는 무리들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교회로 모아 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먹여서 자라나게 해야한다. 사역자들은 목자들이 밤에도 그들의 양떼를 자지않고 돌보듯이(행20:31), 깨어서 양떼를 지켜야 하며 그들은 영적인 게으름이나 졸음에 빠져 버려서는 안된다. 꾸준히 분발하여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행해야 한다. “모든 일에 근신하여(딤후4:5)”, 양떼에게 해가 될만한 모든 것을 징계하고 이익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찾아 내야 한다. 또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기쁨으로 선을 행하여야 될 줄 믿는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앞을 내다볼 뿐만 아니라, 과거도 믿음으로 회고 할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현세에 돌아가는 세상의 종말을 내다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태초의 시기에 대해서도 돌이켜 볼 수 있어야 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모든 만물의 근원에 대하여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정확한 지식을 주며, 또한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축복을 간절하고 끈질기게 고 하여야한다. 축복을 받지 않고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기도는 타는 듯한 뜨거운 기도 이다(창32:26).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주님께 의지하며 종종 애통하는 기도의 습관을 사용하자! ‘비췸을 얻은’ 사람들도 믿음에서 떨어질수 있는 것이다. <발람>은 진리의 눈이 뜨인 자였다(민23:3). 그럼에도 그는 그의 열린 눈을 가지고 캄캄한 어둠의 길로 내려갔다. <뿌리를 내리지 않는 나무는 결코 서지 못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내가 태어나 살던 동네는 서울의 한복판... 그러나 소위 말하는 산동네였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러 나올 참이면 약 20분을 걸어야하는데 그 길이 ‘등산’ 수준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친구가 집으로 놀러온 적이 있었다. 집에 도착한 친구는 그 뒤로 다시는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넓은 마당’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내가 살던 곳에서 10여분 정도 더 산을 타야하는 곳이었다. 그나마 우리 집은 수도와 전기는 걱정이 없었는데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곳에 사는 친구 중에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친구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청와대까지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동네였지만 실상은 이러했다.


캐나다에 온지 13년 만에 지난달 한국을 방문했다. 부모님이 내가 태어난 곳에서 여전히 살고 계시기에 정말 오래간 만에 내가 살던 고향 동네를 가게 된 것이다. 가기 전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변했다는 소식을 듣고 간 터라 막연하게 ‘변했겠지’하는 마음으로 갔지만... “변해도 너무 변했다!.” 집을 찾아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공동화장실을 사용했던 ‘넒은 마당’에 고개를 들 때까지 들어야 끝이 보이는 고층의 아파트 수십 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그 곳에 우리 부모님 집도 있었다. 또 초등학교 시절 흙먼지 날리며 해가 지도록 공을 차던 학교 운동장은 ‘로저스센터’에서나 봄직한 파란 인조 잔디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주변을 ‘우사인 볼트’도 뛰고 싶을 정도의 멋진 트랙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시한번 말하고 싶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한국에 도착한지 삼일쯤, 밤늦게 아이들과 함께 동네 산책을 가게 되었다. 산책에 목적지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녔던 교회였다. 너무도 많이 변한 터라...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의 방향만 잡고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교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또 청년시절의 모든 시간을 보낸 곳에 이제는 중년이 되어 아이 셋과 도착한 마음의 고향 ‘교회’…흥분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이들에게 교회를 설명해주고 또 어린시절 교회 주변에서 놀던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혹시 예전에 다니던 길이 있을 까? 하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골목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변해도 너무 변했는데, 골목길은 변하지 않았다.” 는 것이다. 약 두 사람 정도가 마주 지나칠 정도의 좁은 골목길에 약간의 화장실 냄새…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파트와 시원하게 뚤린 큰 도로에 반해 그 속은 여전히 비좁고 불편한 현실 그 자체였다.


골목을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혹시 내 모습이 이런 모습은 아닌가? ‘목사’라는 직함을 받은지 십여 년... 초년생 목사에 비해 지금에 나의 모습은 이전보다 모든 일에 있어 능숙해지고 세련되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내 속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능숙해지고 세련되어 졌는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성숙되어 가고 있는가…? 혹시 겉모습만 변해 있고, 내면의 모습은 여전히 누구하나 섬기기에도 비좁고 불편한 모습으로 시간만 보내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변화’ 그것이 긍정적 방향이라면 꼭 필요하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 모두가 변화를 경험할 때 진정한 가치와 능력을 발휘 할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 민경석 목사 - 한울교회 담임목사 >




스스로 회초리 치며 회개하는 목회자들‥
“말만이 아닌 진정한 회개 됐으면…”

‘한국교회, 회개의 눈물 2015 회초리 기도대성회’가 작년에 이어 지난 7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날 기도대성회는 한국교회의 타락과 침체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에서, 한국의 목회자들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참회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마련됐다.


이날 기도회에서는 한국교회 최고령(104세) 목회자인 김영창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등 원로와 지도급 목회자들이 한 목소리로 ‘저부터 회개합니다’, ‘제가 회초리 맞겠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외치며 교만, 음란, 거짓, 혈기, 불평, 욕심, 쾌락 등 갖가지 죄에 대해 스스로 회초리를 들고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특히 이날 설교한 조용기 목사는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이 강단에 서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오늘 나는 말씀을 전하기보다 회초리를 맞으러 나왔다”며 “목회 50년 동안 나는 많은 사랑과 동정을 받았지만 또 한편으론 걸림돌이 됐고 많은 잘못과 비난받을 일을 했다. 목회에서 물러난 지금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잘못한 것 밖에 없다. 후배들 앞에 회초리로 맞는 것이 맞다. 저를 때려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1년 전에도 회개를 그토록 강조했지만 한국교회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과 함께 ‘쇼’라는 비판의 소리도 나온다. 많은 목회자들이 부자로 산 죄, 다른 사람을 미워한 죄,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죄, 권력을 바라본 죄 등을 회개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물신과 안락을 좇으며 소외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연합단체는 지금도 갈등과 금권이 판친다는 것이다.
방인성 목사(함께여는교회)는 “회개운동은 절실하지만 보여주기식 말로만의 회개는 지양해야 한다”면서 “진정한 회개가 되려면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