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돌연한 사망으로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위중한 상황에 직면했다. 한반도 남과 북의 위정자들과 주민들이 이 시기를 얼마나 지헤롭게 넘기느냐에 한민족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위원장의 사망이 가져올 한반도의 불안정성은 1994년 김일성 사망이 가져왔던 불안정성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것이다. 당시 북한은 공산권 몰락의 여파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지만, 그래도 74년부터 후계수업을 해온 김정일이란 후계자가 존재했다. 물론 김정은도 후계수업을 받고 있었지만, 그 기간이 일천하다. 더군다나 그의 나이는 김일성 주석을 승계할 당시 김정일 위원장 나이의 절반을 조금 넘는 29살에 불과하다. 통상적으로 나라를 다스릴 만한 경험이나 경륜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이다. 여기에 더해 북한에는 94년에는 없었던 핵무기가 존재한다. 자칫 잘못 대응했다간 한반도와 동북아를 격랑 속으로 빠뜨릴 위험도 없지 않다.
그런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느냐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김정은 체제의 안착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전한 북한 방송은 말미에 “김정은 동지의 영도에 따라 더욱 억세게 투쟁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특별방송과 동시에 장의위원 명단과 장의절차 등이 질서정연하게 발표됐다. 이는 북한 권력 내부가 당장은 큰 동요 없이 김정은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김정은 체제가 이미 안착되었음을 알리는 징표로 해석할 수는 없다. 북한 군부의 움직임을 우려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은 북한이 오래전부터 타이의 입헌군주제를 검토해왔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 대북정책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여러 차례 만났던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북쪽 인사들이 타이의 입헌군주제를 높이 평가해 상당한 정도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북한의 차기 지도자인 김정은에겐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같은 절대권력이 없다. 따라서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당 행정부장과 리영호 북한군 총참모장 등이 집단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시스템이 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회와 내각 대신 당과 군이 권력을 행사하는 변형된 입헌군주제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김정일 사후 북한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급변사태를 초래하리란 분석은 북한을 자멸시켜 흡수통일하자고 해온 이들의 희망적 관측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 정부가 할 일은 자명하다. 모험적인 흡수통일론자들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이 기회를 대북관계 개선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 조문파동을 일으켜 이후 남북관계를 크게 경색시켰던 김일성 사망 당시 상황이 재연돼서는 결코 안된다. 그렇지 않아도 현 정권은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으로 북한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당장 이틀 전에 일어난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을 우리 정부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우리의 대북 정보력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얄팍한 단기적 이익을 위해 경거망동하다간 민족과 국가를 전대미문의 위난에 빠뜨릴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말해 현 상황이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했다. 지금 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김 위원장의 역사적 공과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고, 꽉 막혀 있던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일이다. 이를 통해 북한의 새 지도부와 신뢰관계를 형성한다면 북을 개방사회로 유도해 한반도를 안정화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진지한 대응을 기대한다.
<한겨레신문 권태선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