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시설 학대 10억$소송

● CANADA 2013. 9. 23. 13:49 Posted by SisaHan
오릴리아 주립시설 피해 원생들 온주 정부에

오릴리아의 온주 장애인 시설에서 지적 장애원생들에게 장기간 조직적 학대가 가해졌다며 주 정부를 상대로 10억달러(1조여원)를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집단 소송이 제기됐다. 캐나다통신은 15일 2009년 폐쇄된 오릴리아의 주립 장애인 시설에서 지난 수십년 간 자행된 원생학대에 대한 현금 배상요구 집단 소송이 16일 제기됐다고 전했다.
소송은 지난 2010년 온주고법이 1945~2009년 기간 시설에서 이뤄진 학대 행위에 대해 집단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결한 지 3년 만에 진행되는 것이다.
문제의 시설은 지난 1876년 ‘오릴리아 바보피난처’라는 명칭으로 문을 연 이래 133년간 발달 장애를 앓는 장애인들을 수용해 왔으나 학대 물의에 휩싸이면서 폐쇄됐다.
 
이전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떠들거나 교사 지시에 따르지 않는 원생들에게 바지를 벗긴 채 교실을 돌게 하는 벌칙을 가하거나, 교사가 정한 ‘검은 표시’ 벌칙을 받은 원생에 다른 원생들이 발로 차고 때리도록 강요하는 학대가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 강제 노역을 당한 원생도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 시설에서 학대를 당한 원생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연로한 나이지만 당시 자신이 당한 학대가 조직적으로 가해진 것으로 증언했다. 6살 때부터 10년 간 수용됐던 마리 슬라크(59)씨는 “그곳 생활은 감옥과 같았다”면서 “그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빼앗아 갔다”고 말했다.
이들은 보상 여부를 떠나 주 정부가 당시 시설측의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해 줄 것을 바라고 있지만 주정부측은 부분적으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조직적 행위에 대한 공식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재 상봉 방식 2033년까지 이어간다면 
이산가족 가운데 절반 이상은 가족 못 만나
사망 전에 단 한번이라도 가족 만나게 하려면 매년 7천여명으로 상봉 규모 늘려야


20년 뒤인 2033년엔 현재 생존한 남한의 이산가족 모두가 세상을 뜰 것으로 예상됐다. 남북이 2004년 이후의 상봉 추세를 2033년까지 이어간다면, 현재 생존한 이산가족의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북한의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현재의 이산가족들이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북한의 가족들을 만나려면 상봉 규모를 1년에 7000명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6월 발표한 ‘이산가족 상봉 재개, 더는 시간이 없다’ 보고서를 보면, 2004년 이후의 매년 이산가족 사망률 2.9%와 사망자 숫자 3800여명 고려할 때 올해 5월까지 생존한 이산가족 7만3461명은 2033년 이전에 모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됐다. 평균 기대 여명으로 분석해도 6·25 종전 이전에 태어난 60대의 기대여명이 20.0년, 70대가 12.4년, 80대가 6.6년이어서 역시 2033년에는 60대 이상이 모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됐다. 다만 6·25 종전 이후에 태어난 50대의 경우는 기대 여명이 28.6년이어서 2041년까지 생존할 것으로 예상됐다.
반면, 2004년 이후 이산가족들의 연 평균 상봉률은 매년 1.2%씩 늘어나는 데 그쳐 이 추세가 2033년까지 지속되더라도 누적 상봉률은 44.8%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결국 이산가족 상봉률이 매년 1.2% 증가를 유지한다면 전체 이산가족의 55.2%는 생전에 북한의 가족을 단 한번도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사정이 이런데도, 이산가족 상봉률이나 숫자는 이명박 정부 이후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정부 차원의 이산가족 상봉은 매년 1800명 규모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절엔 2차례 1770명에 불과했고, 2008년과 2011년 이후엔 단 한 차례도 정부 차원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지 못했다. 정부 차원의 남북관계가 막힘에 따라 민간 차원의 상봉도 2000~2007년 169~677명에서 2012년 6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현재 생존해 있는 이산가족들이 앞으로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북한의 가족을 만나려면 매년 상봉 규모를 최소한 7068명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 특히 그 가운데 70살 이상의 고령자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매년 6225명 이상, 50~60대는 매년 590명 이상 만나야 생전에 북한의 가족들을 한번이라도 볼 수 있다.
<김규원 기자>

 


Jesus in the City… 한인성도들 동참 ‘영적회복’외쳐
“내년에는 더 많은 목회자·성도들 참여했으면”

“쏟아지는 빗줄기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폭포수였습니다. 비 때문에 걱정했지만, 참가자들 모두 오히려 빗속에서 종전 어느 때보다 훨씬 깊은 감동으로 가장 큰 은혜를 누린 하루였다며 기쁨의 눈물을 쏟기도 했습니다” 
행사 내내 굵은 비가 흩뿌린 궂은 날씨 속에서도 ‘예수님 찬양 행진’ 참가 성도들은 흔들림없이 토론토 중심거리를 누비며 우렁한 찬양의 함성을 울렸다. 십자가를 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로마병정, 다양한 유대 의상으로 분장한 한인 성도들에게는 많은 연도의 시민들이 호응하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토론토의 성시화를 기원하며 기독교인들이 주의사당 앞 퀸즈파크에 모여 도심행진을 벌인 ‘2013 Jesus in the City’ 퍼레이드가 한인 10여 교회와 전도대학, 유학생선교회, YWAM 등 단체들의 성도 3백여명을 포함한 다민족 교회 크리스천 수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7일 낮 전개됐다.
 
올해로 14회째인 크리스천 퍼레이드는 참가자들이 의사당 건물 앞에서 찬양과 예배를 드린 후 영&블루어 역을 돌아오는 행진이 2시간여 진행됐다. 이날 각 커뮤니티 크리스천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축제분위기 속에 대형 트레일러 장식차량과 도보로 찬양과 퍼포먼스를 하면서 시가행진, 시민들에게 영적 회복과 신앙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다.
먼저 드린 예배는 각 커뮤니티 대표목회자들이 기도와 메시지를 전했다. 한인교계는 YWAM 김규석 목사가 나섰다. 이어진 행진은 참가 성도들의 다양한 차림새와 찬양, 밴드, 춤이 어우러져 시선을 끌었다. 특히 한인성도들은 서인구 소망교회 담임목사가 올해도 구레네의 시몬으로 분장해 행진하는 등 2주 동안 연습해온 성극팀 등 참가자들이 옛 유대복장으로 실감있게 분위기를 살렸다. 이날 10여명의 한인목사들도 동참했다.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한 허인희 장로(소망교회)는 “빗속 행진에 모두가 예수님 은혜로 눈물흘렸다” 면서 “내년에는 더 많은 목회자와 교회들이 참여하기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 문의: 647-207-0702, 647-209-2500, www.jesusinthecity.com >


[1500자 칼럼] 오래된 수첩

● 칼럼 2013. 9. 16. 18:48 Posted by SisaHan
나는 비겁하다고 지인들에게 가끔 얘기한다. 누구나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나를 위로해준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다. 오래된 기억의 수첩을 들춰보면 내가 비겁한데는 정당한 이유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군대생활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무의식으로 숨어 나를 괴롭히곤 한다. 
얼마전 모국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세포들이 감전된 듯 한순간 정지됐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옛 기억이 떠올랐다. 
허일병 조작살인사건이란 이름으로 30년을 끌어온 법정 싸움이 그 뉴스였다. 
지난 1984년 발생했던 사건을 살펴보자. 이 사건을 파헤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4월2일 중대본부에서 술파티가 열렸다. 당시 모 중대장이 “라면이 맛이 없다”며 모 선임하사를 질책하자, 문제의 하사관은 만취상태에서 중대본부를 나와 행패를 부리다 허일병을 향해 우발적으로 자신의 M16 소총을 발사, 허일병은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다. 당시 사건 은폐를 위해 대대급 간부까지 참여한 대책회의가 열렸고, 허일병의 피살현장을 목격한 사병들을 대상으로 “알리바이 조작” 등을 위한 특별교육까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은 그러나 이것을 자살이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을 내 경우에 대입해보자. 
1978년 여름 내가 복무하던 서울의 한 부대에서 취침점호시 갓 전입한 이등병이 사망했다. 점호시 나는 행정반에 있었고 얼마후 1소대 내무반장이 찾아와 한 이등병이 죽은 것같다고 전했다. 장시간 축구를 해도 멀쩡했던 내무반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사태파악에 나섰다. 한 이등병이 운전업무후 점호시간 조금 전에 도착했고 한 고참병이 군기를 잡기 위해 복부를 가격했다는 것이다. 몇 대 맞은 이등병은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질려 침상에 쓰러졌다. 이때 당직사관이 점호를 위해 내무반에 들어오는 바람에 이등병 얼굴을 담요로 덮었다. 그리고 난 후 다시 확인해보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부대는 발칵 뒤집혔고 퇴근한 중대장이 돌아오고 곧 대대본부와 보안대에서도 요원들이 파견됐다.
물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피해자는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정리됐다. 모든 중대원들에게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특별교육이 실시됐다. 병사가 한 명 사망하면 기록하고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16가지가 넘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사고를 낸 고참병은 특별 감시 대상이 됐다. 혹 스트레스로 인해 사고를 칠 수도 있다는 걱정때문이었다. 그후 그는 외박을 나간 뒤 며칠씩 부대복귀를 하지 않아 부대간부들의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그는 제대 후 시청의 공무원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사람을 죽인 죄책감으로 힘들게 살고 있을 것이다.
 
허일병을 쏜 것으로 알려진 하사관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발생 직후 아무 징계조처도 당하지 않고 사단내 다른 중대로 전보된뒤 승진해 90년초 상사로 예편했고, 이 하사관은 위원회 조사에서 “술에 만취해 총을 잡은 것 같지만 그후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S.프로이트는 의식에 있어 고통스러운 것, 허용될 수 없는 것, 온당치 못한 것은 억제되어 무의식의 세계로 추방된다고 말했다. 
나는 내게 묻는다. 아무에게도 말못했던 이 사건을 이제서야 말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폐쇄된 한 조직의 일사분란한 행동에 그냥 따라갈 수 밖에 없었던 불쌍한 나를 용서해본다. 그 무의식을 끌어올려 화해를 청한다. 내가 비겁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어쩔 수 없었던 것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있다 나도 폭력 앞에서는 아버지! 하고 무릎 꿇는다 멍텅구리 배안에선 어쩔 수가 없다.”
-이성복 시인의 시 <멍텅구리 배 안에선> 부분.

< 김형주 - 시인, 해외문학 신인상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부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