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범 앵커가 한국방송(KBS) 사장 후보자로 선임되자 한국방송 선후배 기자들의 반대 성명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김건희 여사가 디올백을 받은 일을 두고 윤석열 대통령 앞에서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의 조그마한 백’ 등으로 돌려 말하던 박 후보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최종 임명되면, 한국방송은 더욱 노골적인 ‘땡윤방송’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게 기자들의 우려다.
30일 한국방송 기자협회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 방송사 소속 기자 496명은 박 앵커가 사장 후보로 낙점된 다음날인 지난 24일부터 29일까지 릴레이 기수 성명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박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현재까지 성명에 참여한 기수는 가장 고참급에 속하는 18기부터 지난해 입사한 막내 기수인 50기까지로, 존재하지 않는 기수(49기)와 중도 퇴사 등으로 기자가 없는 기수(44기) 등을 제외하면 모든 현직 취재·촬영기자 기수가 박 후보에 대한 반대 성명을 낸 것이다.
가장 마지막에 성명을 낸 29~30기 기자들은 “박장범 사장 후보자에 대해 다른 곳보다 보도본부의 구성원들이 먼저 반대의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최근 1년 가까이 리포트 제작자와 뉴스 진행자로서 메인뉴스를 함께 만들어 오면서 그가 어떻게 케이비에스 뉴스를 훼손해 왔는지 겪어왔기 때문”이라며 “요약하자면, 케이비에스 뉴스 진행자로서도 충분히 결격인 그가 케이비에스를 이끄는 리더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 후보는 1994년 한국방송 공채 20기로 입사해 경제부와 정치부 등을 거쳤으며, 지난해 11월 박민 사장 취임 첫날 ‘뉴스9’ 앵커로 발탁된 바 있다.
지난 2월 한국방송(KBS) 1티브이(TV) 채널을 통해 방영된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방송에서 진행자인 박장범 앵커가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해 질의하며 ‘파우치 논란’이라고 표현한 장면. 한국방송 유튜브 갈무리
성명에 이름을 올린 한국방송의 한 중견급 기자는 “496명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기자로 입사해 현재까지 취재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의 대다수가 박 후보의 사장 임명에 반대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노동조합이나 기자협회 등 사내 기구가 나서서 조직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케이비에스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라고 설명했다.
노태영 한국방송 기자협회장은 이번 릴레이 성명 사태와 관련해 “1차적으로는 박장범 후보가 케이비에스 뉴스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뉴스9 앵커를 맡은 지난 1년간 뉴스를 얼마나 공정하게 다뤘느냐에 관한 준엄한 평가일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박민 사장 체제에서의 한국방송 뉴스에 대한 총체적 성적표의 의미도 있는 것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앞서 한국방송 기자협회는 지난 9월 소속 기자 46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모바일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는데, 당시 조사에선 응답자 10명 중 9명 이상(91%)이 자사 보도가 불공정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KBS)본부는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 앞에서 7년만에 조합원 총회 및 공영방송 사수 결의대회를 열었다. 한국방송본부 제공
한편 한겨레는 한국방송 기자들의 릴레이 반대 성명과 관련해 당사자인 박장범 후보에 대한 입장을 들으려고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연락을 취했으나 30일 오후까지 답을 듣지 못했다. < 한겨레 최성진 기자 >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 군을 참관단으로 보낼 가능성을 열어둔 가운데, 야당은 “국회 동의 없이 한 명이라도 참관단을 보낸다면 김용현 국방부 장관 탄핵 등 다양한 법적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경고했다.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30일 오전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석열 정권이 우크라이나에 정예요원 파견을 검토중이다. ‘모니터링단’, 즉 참관단이란 이름으로 국회 동의를 피하기 위해 파병하는 꼼수다”라고 비판했다. 앞서 29일 국정감사에서 국가정보원은 우크라이나에 한국 ‘참관단’이나 ‘신문조’를 보낼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원론적으로, 필요하면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군과 국정원 일부 요원을 우크라이나 현지에 파견해 북한군 동향을 파악하고 포로 신문에 협조하겠단 것이다. 김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남북 대리전을 자청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라며 “우리 정부는 그동안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을 해왔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라고 선을 그었다.
정부는 개인단위 파병은 부대단위 파병과 달리, 국회 동의 없이도 국방부 장관 결정으로 집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김 최고위원은 “외국과 공모해 전쟁의 단초를 여는 건 형법 92조 외환유치죄에 해당한다. 국회가 국군의 해외 파병 동의권을 가지며 단 한 명이라도 보내는 건 파병으로, 국회 동의 사항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당은 만약 윤석열 정권이 국회 동의 없이 우크라이나에 참관단을 보낸다면 국방부 장관 탄핵 등 다양한 법적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 한겨레 엄지원 기자 >
15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 마을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현지 시장이 불타고 있다. 미콜라이우/AP 연합
대통령실이 30일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활동 모니터링은 ‘정부의 의무’라며 전황분석팀을 현지에 보낼 뜻을 밝혔다. 앞서 지난 24일 김용현 장관이 국방부 훈령을 근거로 ‘개별 차원의 파병’은 국회 동의 없이 자신의 정책결정만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법률 전문가들은 이 훈령이 위헌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야당은 “국회 동의 없이 한 명이라도 우크라이나에 보낸다면 김용현 국방부 장관을 탄핵하겠다”고 경고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우리로서는 우크라이나라는 우방국에 (대한) 북한군 활동의 전황을 살피고, 분석하고, 모니터하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통해서 현지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현대적 전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우리도 방어적으로 정당하게 그들의 활동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며 “앞으로 (북한군의) 활동과 전황을 모니터링하는 팀을 미리 만들어서 보낼 준비를 할 필요는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정원도 전날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우크라이나 참관단 파견과 북한군 포로 신문 참여에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이로 미뤄보면, 전황분석팀(참관단) 임무는 △북한군 무기체계와 전술과 우크라이나전쟁 교훈 분석 △북한군 포로 신문 참여 등이 꼽힌다. 이 경우에는 군의 무기체계 전문가, 군 정보 요원 등이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국방부는 전황분석팀은 국회 동의 없이 보낼 수 있다고 본다. 김 장관은 지난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파병하더라도 규모·기간·임무를 고려해서 개별 차원의 파병은 국회 동의 없이 장관 승인 아래 할 수가 있다”고 답했다.
김 장관의 주장은 ‘국군의 해외파병업무 훈령’에 근거한 것이다. 이 훈령은 해외 파병을 ‘부대단위’와 ‘개인단위’로 나누고, 개인단위 해외파병은 국회 동의 없이 국방부 장관의 정책 결정에 따라 이뤄진다고 명시해 놨다. 이 훈령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8월 시행됐다.
법률 전문가들은 이 훈령이 ‘파병을 할 때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강제’한 헌법 제60조 2항의 취지를 정면으로 무시한 위헌이라고 지적한다. 임지봉 서강대 법률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 조항에 근거가 없는 일을 해도 위헌인데, 헌법에서 명시한 내용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어서 더 명백하게 위헌”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해마루 임재성 변호사는 “우리 헌법이 국군의 해외파견를 국회 동의사항으로 한 것은 군사영역에 대한 행정부의 권한을 입법부가 적절히 견제하는 헌법적 결단이고, 삼권분립을 상징하는 대표적 규정”이라며 “이 국회동의 절차는 법률로도 제한할 수 없는 건데, 이걸 장관이 정하는 행정규칙 수준인 훈령으로 피할 수 있다는 주장은 위헌 그 자체”라고 비판했다.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참관단이란 이름으로 국회 동의를 피하기 위해 파병하는 꼼수”라며 “국군 단 한 명이라도 보내는 건 파병으로, 국회 동의 사항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당은 만약 윤석열 정권이 국회 동의 없이 우크라이나에 참관단을 보낸다면 국방부 장관 탄핵 등 다양한 법적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에서는 헌법재판소에 이 훈령의 권한쟁의심판을 내고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등도 준비하고 있다. < 한겨레 신형철 기자 >
조태용 국가정보원장, 김남우 국가정보원 기조실장, 황원진 국가정보원 2차장, 윤오준 국가정보원 3차장이 지난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국정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원 국정감사에 참석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북한군 참전 김정은 체제 강화 ... 남북대결 격화 메드베데프의 '이이제이' 경고대로 움직인 러시아
북 참전 전부터 한국제 포탄 우크라 대량 반입 대국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포섭당한 남 북
1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문화정보부 산하 전략소통·정보보안센터(SPRAVDI)가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줄을 서서 러시아 보급품을 받고 있다고 공개한 영상. 2024.10.27. 연합
북한이 러시아를 돕기 위해 우크라이나전에 대규모 특수부대를 파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20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관련 방송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국가정보원은 지난 18일 "북한이 지난 8일부터 13일까지 러시아 해군 수송함을 통해 북한 특수부대를 러시아 지역으로 수송하는 것을 포착했다"면서 "북한군의 참전 개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2024.10.20. 연합
북한군의 러시아 입국과 우크라이나 전선 파병설이 난무하더니 국방부와 정보기관 고위관리들로 구성된 한국정부 대표단이 브뤼셀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본부를 찾아갔다. 나토 및 유럽연합 쪽과 북한군의 우크라이나전 파병에 대한 정보공유 및 대책 논의를 한 방문자들은 조만간 우크라이나도 방문할 모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들이 우크라이나 정보·국방 당국자들과 전황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28일 마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의 전화통화에서 밝혔다. 그에 앞서 윤 대통령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도 통화하면서 우크라이나 국경지대로 이동한 북한군의 실전 투입이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이뤄질 수 있다는 정보 판단도 공유했다.
우크라 전선 북한군을 겨냥할 한국제 무기
며칠 전인 25일 <가디언>은 한국의 무기 지원이 수천 마일 떨어진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북한군을 죽이는데 사용될 가능성을 키우겠지만, 한국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 강화 욕구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기사(‘혈맹’: 한국이 북한의 우크라이나전 개입을 두려워하는 이유, ‘Blood alliance’: why South Korea fears North’s involvement in Ukraine war)에서 유안 그레이엄 호주 전략정책연구소 선임 분석가는, 문제는 한국정부가 직접적인 군사지원 규제를 완화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개헌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과 북 모두 전쟁에서 귀중한 정보를 얻고 있다. 서울이 키이우에 직접 살상 무기를 제공한다면, 이는 남북한(two Koreans)이 대리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2024.10.29. 연합
북한군 참전 김정은 체제 강화, 남북대결 격화
<가디언>은 실전경험이 없는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러시아의 바람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북한군의 참전은 김정은 체제에 많은 이점을 가져다 줄 것으로 봤다. 스톡홀름대학 한국학과 부교수 가브리엘 욘손은 북한군의 참전은 북한에게 군과 무기 역량을 테스트할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경제적 이익과 미사일 및 핵 프로그램 개발에 필요한 도움을 러시아로부터 받게 해 줄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과 푸틴의 밀착은 미국 등 서방의 제재에 대처하기 위한 북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더욱 힘을 실어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국에겐 나쁜 뉴스다. 그렇게 되면 남에서도 핵무기를 자체 개발해야 한다는 소리가 더 커질 것이다.
대리전을 매개로 한 남북한의 대결 고조는 남북 양쪽 권력자들의 집권에 유리한 정치환경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그레이엄은 우크라에 대한 서울의 살상 무기 직접 제공이 남북한 대리전 참여를 두드러지게 할 것이라고 했지만, 한국의 간접적인 무기 지원과 (아직 단정할 순 없지만)북한군의 전선 투입으로, 남북한 대리전은 아직 두드러지지 않을진 몰라도 이미 시작됐다. 그레이엄은 북한과 러시아의 혈맹관계 발전을 한국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한국이 자초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리고 어쩌면 한국에는 한반도에서 7300km 떨어져 있는 유럽 한복판에서의 남북한 대리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심 반기는 세력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기호 의원이 10일 서울 용산구 합동참모본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2024.10.10. 연합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 시작에 앞서 자료를 살피고 있다. 2024.10.29. 연합
”우크라에 북괴군 부대 폭격하게 해 심리전에 활용“
한국 방문자들과 만난 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북한군이 러시아에 파병돼 러시아 남서부 쿠르스크 주에 배치돼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이 점령 중인 러시아 쿠르스크 주 일부든 우크라이나 본토든 북한군이 러시아-우크라 군 대치 전선에 투입되는 순간 한국제 무기가 그들을 향해 날아갈 것이고, 한국의 군사안보 전문가들이 제공한 북한군의 전략 전술 등에 대한 정보들이 우크라 야전군에 전달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와 협조가 된다면 북괴군 부대를 폭격, 미사일 타격을 가해서 피해가 발생하도록 하고 이 피해를 북한에 심리전으로 써먹었으면 좋겠다”고 지난 24일 국정감사장에서 신원식 대통령실 안보실장에게 문자를 날린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의 언행을 그의 주장대로 “사적인 대화 차원”의 별것도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육사 37기의 예비역 중장인 신 실장은 “잘 챙기겠다”며 “오늘 긴급 대책회의를 했다”고 선배인 한 의원 문자에 화답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육사 31기의 예비역 중장인 한 의원은 그 1주일 전인 17일 육군본부 국정감사에서 “북한군이 우크라이나전에 1만 명 이상 파병돼 있다면 우리도 최소한으로 참관단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용현 국방부장관은 그날 국정감사에서 모니터링 요원의 우크라이나 파견이 “단계적 조치의 하나에 포함돼 있다”고 했다.
이런 사태로의 발전은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난 6월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꼐 자동차를 타고 얘기하고 있다. 가디언 10월 25일
푸틴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화의 부의장. 위키백과
메드베데프의 '이이제이' 경고대로 움직인 러시아
지난해 4월 18일, 1주일 뒤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에 대해 발끈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그때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무기 지원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라든지, 국제사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학살이라든지,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인도지원이나 재정지원에 머물러 이것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 말은 몇 가지 전제조건을 달고 있지만, ‘살상무기 지원 불가’라는 한국정부 기본입장을 상황에 따라 바꿀 수도 있음을 대통령이 직접 밝힌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메드베데프 부의장은 그 발언에 대해 바로 다음날 이렇게 맞받았다.
“그 나라(한국) 국민이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우리의 파트너인 북한의 손에 있는 것을 볼 때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메드베데프는 “최근까지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어떤 살상무기 제공 가능성도 배제한다고 분명히 확인했다”면서 “우리의 적을 돕고자 하는 새로운 열성가가 등장했다. 한국의 윤 대통령은 한국이 원칙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한 뒤 이처럼 북한에 대한 러시아제 최신 무기 제공이란 맞대응 협박카드를 꺼내 보였다. 그는 그것이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 서로 주고 받기. 맞대응)”라고 했다.
더 적나라하게 얘기하면, 이건 일종의 이이제이다. 서로 죽이겠다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는 '북쪽 오랑캐'를 끌어들여 '남쪽 오랑캐'를 막겠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메드베데프가 경고한 대로 움직였다.
북 참전 전부터 한국제 포탄 우크라 대량 반입
그 바로 전인 지난해 4월 8일 우크라 전쟁 및 각국에 대한 첩보와 정보수집에 대한 미군의 기밀 문건이 인터넷에 유출된 사건이 터졌다. 유출된 방대한 문건 중에서 그 전달인 3월 초에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대통령실 산하 국가안보실 실장의 대화를 도청한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포함돼 있었다. 수집된 정보에는 한국산 155mm 포탄 33만 발의 미국 수출 일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진해항을 출발해 독일 노르덴항으로 가는 것으로 돼 있는 한국산 포탄들의 최종 행선지는 우크라로 추정됐다.
3월 16일 도쿄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를 ‘제3자 변제’라는 편법으로 밀봉함으로써, ‘화해’라는 이름의 한일유착을 압박한 미국 바이든 정부의 요구를 수용한 윤 대통령은 4월 25일 미국을 방문했고, 8월에는 국빈방문으로 캠프데이비드에서 환대받았다.
그해 12월 4일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이 그해에 한국에서 건네받아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공급한 155mm 포탄량이 모든 유럽 국가들의 공급량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포탄이 러시아로 실려가고, 군인들까지 파병되기 전부터 이미 한국제 포탄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우크라이나로 대량 흘러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기사는 보여 준다.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며 반박한 적이 없다.
대국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포섭당한 남북
그렇다고 북한까지 우크라이나 전쟁에 끌어들인 러시아의 대응이 정당화될 순 없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미국 등 서방의 ‘동진’(유럽연합과 나토의 동쪽으로의 세력 확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유발했다고 해서 러시아의 침공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것은 일본군의 조선 및 중국대륙 침략과 하와이 진주만 미 태평양함대 기습 공격을 일본의 이익(팽창정책)을 방해 내지 훼손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러시아, 미국 탓으로 돌리며 정당화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일본 우익은 지금도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강점, 중국대륙 침략을 러시아와 미국 등 서방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인한 국가존망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행한 자구책 내지 정당방위라고 우기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것은, 군국 일본의 조선,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러시아와 한몸처럼 묶여 있던 우크라이나에는 지금 러시아와의 통합을 바라는 주민들도 상당수 존재하지만, 절대다수 국민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러시아와의 통합 또는 그 지배체제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 주민들의 의사는 우선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 땅에까지 가서 남북한이 대리전을 펼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전쟁 자체가 용납돼선 안 된다. ‘대국’들의 헤게모니 경쟁에 포섭돼 분단으로 상징되는, 70년이 넘는 자민족의 분열을 확대 재생산해 온 남북이 그 비참한 역사를 유럽 땅에 수출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 민들레 한승동 기자 >